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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Jun 12. 2021

갈아야 할 일, 닦아야 할 일

#오래된 샤워 호스

일 년 전부터 아직까지 나는 그녀가 어떤 사람일지 달리 알아보려고 한 적이 없었다. 

나에게 그녀의 모습을 비춰 주는 마법의 거울을 흩트려 놓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소설 「실비」中, 제라르 드 네르발 (소설집 '불의 딸들')





미루는 일들은, 늘 미뤄도 될 만한 일들이다. 


이런 것들을 해치우기 위해선, 약간의 의지와 더 약간의 노력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들어서기만 하면 늘어지기에 바쁜 집에서, 의지나 노력은 꽤 드물게 생겨난다, 그게 아무리 소량일지라도. 


그래서 어떤 계기가 등을 툭, 떠밀기 전에는 일들이 늘 미뤄진다. 

이를테면, 샤워 호스 교체가 그랬다. 



'언제 한 번 교체해야지' 했었지만 손을 대지 않던 호스를 교체하기로 한 건, 

어느 쇼핑 앱의 적립금 덕분이었다. 


2주일 안에 소멸될, 그것도 금액이 크지 않은 적립금을 쓰려다 보니, 

생활용품 쪽을 보게 됐고 1.5m짜리 샤워 호스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6개월~1년에 한 번씩은 교체를 해주어야'하고 

'초보자도 쉽게 교체할 수 있다'는 문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결제를 했다. 



새 호스가 오고 나서야 기존의 샤워기를 살펴본다. 

사진 찍기에도 더러울 정도여서 잠시 닦아냈지만 유독 호스는 닦이지 않는다. 

자세히 보니 물때가 아니라 표면이 벗겨져있다. 

그동안 잘도 대충 살았구나 싶다. 

 


공구함 구석에서 누군가 이 집에 놓고 갔던 몽키스패너를 찾았지만 너무 작다. 

다시 공구함을 뒤지니, 다른 스패너가 있다. 

몇 년 전 급하게 뭘 조립한다고 다이소에서 샀던 기억이 났다. 

전문 작업을 하기엔 많이 부족해 보이는 스패너였지만, 호스 이음새를 돌리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서너 번 돌리니 손으로 풀만큼 헐거워진다. 


겨우 서너 번. 이게 귀찮아서 미뤘는지도 모른다. 



호스 안을 확인해보고 싶은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스테인리스를 자를 수도 없고, 확인해보지 않아도 심각하게 더러울 거라는 걸 알아서 그만둔다. 


물이 빠지도록 욕조에 걸쳐두고, 샤워 헤드를 손으로 돌려 뺀다. 

헤드는 작년에 새로 사서 많이 더럽진 않다. 

뭘로 닦을까 하다가 손에 잡힌 셰이빙 크림을 뿌리고  닦아낸다. 

물때는 쉽게 벗겨진다.


조립은 금방 끝난다. 

헤드는 돌려서 끼우고, 물이 나오는 부분은 스패너로 몇 번 조인다. 

 


겉만 닦고 잠시 더 써야지 했다. 

보이는 때는 눈에 거슬리니 그것만 처리하고 

오늘 갈든 내일 갈든 상관없겠지 하는 생각. 

그러다 보니, 이렇게 쉽게 갈 걸 한 번도 갈지 않았다. 


이렇게 쉽게 처리하고 나니 새삼, 

갈아야 할 것과, 닦아야 할 것이 다르다는 걸 깨닫는다.  


대개 이 둘을 혼동한다. 

변화가 굳이 필요해 보이지 않는 안온한 일상의 무게감 때문에, 

눈에 보이는 오염만 적당히 제거하면 이 일상이 무탈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하지만, 내 일상의 전면에 있는 것들이 최선이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집, 회사, 관계 모두, 무언가를 버리고 택한 무언가들로 구성돼 있는데, 

내가 택했다는 이유로 무턱대고 유지하는 게 최선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싶다. 

닦을 건 닦아 두되, 갈아야 할 건 주저 없이 갈아치워야 하지 않을까. 



마음이 불안할 때 하나하나 리스트를 적는 취미가 있다. 

이를테면, 

해야 할 일 / 안 해도 될 일

가진 것 / 가지고 싶은 것 / 버릴 것


하지만, 정작 적으면 끝이었다. 지금의 내 모습을 확인만 하면 된다는 식이었다. 

그리고 조치할 게 분명 눈에 보임에도 일단 덮어뒀다. 


어쩌면 그렇게 계속 덮다 보니, 

갈아야 할 것은 여전하고, 닦아야 할 것들만 손대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된 게 아닐까.  


그건 자신의 세계를 흩트려 뜨리기가 두려워

스스로에 대한 연민만 즐기는 악취미 때문이기도 하고, 

하루씩 연명시키는 불완전한 세계를 지탱하는 

불합리하지만 안전한 옹졸함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리스트 적는 걸로만 만족하는 게으름은 이제 버려야겠다. 

몇 년을 벼르던 샤워 호스를 몇 분 만에 갈 수 있듯, 

갈아야 할 것들에 손을 대면 어떻게든 해결될 것이다. 


그건, 겨우 만든 일상을 흩뜨려 놓기보다는, 

내 하루하루를 경직되게 만드는 불필요한 것들을 치우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빈 공간을 확보하면,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이 그 자리를 채울 수도 있지 않을까. 



오래된 호스는 뒷베란다로 치우고 공구를 정리한다. 

그리고,


샤워를 한다. 최대한 길고 기분 좋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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