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 달간의 이사 준비

#소진과 폐기에 대하여

by 너무 다른 역할

땅을 갈 때는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돼.

필요한 만큼 조금씩 갈아야지. 그래야 땅도 많은 것을 주거든.


-탐험에세이 「데르수 우잘라」中 _블라디미르 아르세니에프





이사가 결정됐다.

아니다. 정확히는, 이사를 결정했다.


이런저런 상황이 겹치다 보니, 이사일은 넉 달 뒤.

급하게 이사를 하는 거라면 무엇을 정리할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변명'이나,

깜빡하고 처리하지 못한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누군가의 호의를 바라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넉 달의 준비 기간이면, 그런 요행에 기대기는 힘들어졌다.


하지만, 14년이 넘게 살아온 집을 어설프게 떠나지 않게 돼서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긴 시간 동안 짐들도 많이 쌓였지만, 다른 것들도 많이 담겨 있는 집이기에,

이사를 준비하면서 섭섭함과 기대를 천천히 즐기기로 했다.



이사 갈 집의 계약이 끝나는 동시에,

머릿속에 버려야 할 것의 리스트가 떠올랐다.

그만큼 미련하게 쌓아둔 것들이 많다는 얘기이다.


당장 메모를 할까 하다가 며칠 그냥 둔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집이라는 건 묘하다.


눈에 잘 띄는 곳은 눈에 잘 띈다는 이유로 붐비고,

구석은 구석이라는 이유로 빼곡하다.


오랫동안 물건들이 스스로 축적된 듯도 하다.

꾸준한 나이테처럼 별스런 증거물처럼, 물건들의 흔적들이 쌓여 있다.

하나를 꺼내면 그 뒤에 있는 것들이 따라 나오고,

그것마저 치우면 그 옆의 것들이 무너지듯 자리를 채운다.


하나하나 정리하다 보면, 잊고 있던 물건들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들일 때 분명했던 이유가 어느새 희미해진 것들,

마음에 들지 않아도 정리하지 못했던 것들.


비단 물건만이 아닐 텐데......그것들도 넉 달 동안 천천히 정리될 것이다.



큰방, 작은방, 부엌, 거실, 앞 베란다, 뒷베란다, 벽장, 신발장, 벽.

큰 집이 아님에도, 공간마다 뭔가가 가득이다.


미련은 접고, 폐기해야 할 것들을 우선 버리고

소진해야 할 것들을 차례로 소진하기로 한다.


그렇게 조금씩 공간이 비면,

이 집이 더 또렷해질지 아니면 더 희미해질지,

그리하여 자신을 내세울지 아니면 감출지 그건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긴 시간 내 손으로 채웠던 것들을 시간을 들여 내 손으로 치우다 보면,

적어도 이곳에 두고 갈 기억들은 굳이 서운해하지 않겠지 싶다.

의뭉스러운 말줄임표나 쉼표 대신 하나의 마침표를 얻는 셈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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