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의 여력으로도, 캔정어리덮밥

by 너무 다른 역할

더위를 핑계로 한량으로 지낸다.


운동은커녕 책을 펼치는 것도 귀찮아하고,

호기심을 갖고 뭔가를 바라보는 일도 뜸해졌다.

생각의 단초가 떠올라도 억지로 잡아놓지 않고,

기본적인 대화마저 줄이고 있다.


말하자면, 여력(餘力)의 총체적인 간소화랄까.



그러다 보니 폭염이 시작된 후,

재료를 손질해 요리를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내가 요리다운 요리에 대한 강박이 없다는 사실과,

전자레인지로도 식생활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정도로.


하지만 이사를 결정하고 나서,

주방 곳곳에 있는 것들을 소진해야 할 필요가 생겼고,

그 의욕 아닌 의욕으로 인해 조금씩 음식을 해 먹고 있다.


그리고 오늘 목표가 된 건, 정어리 캔이었다.



원래는 별다른 조리 없이 와인 안주로 먹으려고 산 거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찬장 구석에 방치돼 있었다.


유통기한은 굳이 보지 않고 캔을 열어 직접 확인한다.

먹을 만하다, 고 판단한 후에 정어리 레시피를 검색한다.


금세, 간소화된 여력으로도 가능한 요리를 찾았다.



정어리덮밥의 재료는 단순하다.

정어리, 양파, 간장.


레시피도 못지않게 단순하다.

세 가지 재료를 한데 넣고 약한 불로 졸이면 끝.

그리고 밥에 부어주면 된다.


대파나 마늘은, 어느 음식에나 마찬가지겠지만, 있으면 좋은 정도다.



소스팬이 따로 없으니 에그팬에,

채 썬 양파와 정어리를 담고 간장을 붓는다.

레시피에 간장은 3~4 숟가락 정도였으니 최대한 힘 조절을 해서 적당히.


냉장고에 언제 샀는지도 모르는 마늘파우더 통이 있길래 뿌려준다.



불을 약하게 틀고 대파를 썬다.

내가 본 레시피에는 덮밥 소스를 밥에 부운 후에 대파를 얹었지만,

재료 전체에 퍼지는 대파 향도 좋으니 한꺼번에 익히기로 한다.



길게 익힐 필요는 없다.

간장이 양파에 스밀 정도면 된다.

향은 금세 집안에 퍼진다.


간을 본다. 조금 짜지만 먹을 만하다.

'다음에는 간장을 덜 넣어야겠다'라고 생각하지만,

언제 또 정어리덮밥을 해먹을지는 모를 일이다.


아마, 그때가 되면 기억을 더듬기가 귀찮아 또 간장통을 통째로 들고 적당히 부을 것이다.

그리고는 조금 짜지만 맛있다고 자기만족을 하겠지...



내가 줄여버린 여력은 다시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저녁 바람에 서늘한 기운이 섞일 어느 즈음일 것이다.


특별한 노력이 없어도,

이런 정어리덮밥 같은 시도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적은 시간과 노력으로도 이렇게 훌륭한 한 끼가 가능하다는 걸 아는 이상,

곧, 스스로에게 핑계를 대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지겨워질 것이다.



밤 10시, 맥주를 곁들여 접시를 비운다.


요란하지도 번잡스럽지도 않은 식사는,

시간에 쫓기던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미룬 직후처럼,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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