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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Apr 15. 2022

남은 사진은 남는다

#중국여행 B컷

사물이 자신의 밖으로 제 상象을 내려놓는 태도가 그림자라면

먼지는 지상의 공기에 떨어지는 바람의 그림자에 가깝다는 것이 그들의 미의식이었다.


-에세이 '먼지에 관한 에테르' 中, 김경주 산문집「패스포트」





사진 속의 세상은 고집스럽다.

사각형의 안과 밖은 확연히 구분되고, 안에 편입된 것들은 확실한 색을 지닌다.


오랜만에 꺼내보는 여행 사진들은 더더욱 고집스럽다.

어느 해의 어느 날, 어느 도시의 어느 골목, 어느 표정의 어느 누군가와 함께 한 여행들.

사진 속의 그곳은 변색되지 않은 채 나를 맞는다.


얼마 전 새벽, 잠이 오지 않아 집안을 정리하다가 운동화 상자 하나를 열었다.

이전 집에서 벽에 붙여놓았던 사진들이 들어있었다.

새로 온 집의 도배한 벽에 예전처럼 테이프로 덕지덕지 사진을 붙이기가 애매해서

상자째 치워뒀던 것들이다.


그중의 한 장을 꺼내 든다.

모서리가 말려 올라간 4*6 사이즈의 사진엔 먼지가 묻어있다.

잠옷 소매로 먼지를 닦아내자, 17년 전 중국의 어느 거리가 살아난다.

이른 저녁, 앳된 소년이 불을 피우고 양꼬치를 굽던 좌판에서

난 0.5 위안 짜리 꼬치를 20개쯤 샀었다.



빛이 바랜 사진을 주방의 중간에 덩그러니 붙여놓고,

여행의 사진 파일들을 하나씩 꺼내 클릭한다.


고대의 화가들이 자신의 그림에 바람을 숨겨놓았듯,

여행 사진들엔 그곳의 바람이 담겨있다.  

요란하건 그렇지 않건 모든 사진에서 바람이 분다.

하나의 신호처럼 혹은 하나의 인장처럼.


특별히 고르고 특별히 인화를 해서 집 안에 붙여둔 사진들은

여행에서 찍어온 사진 중의 일부분이다.

나머지는 차곡차곡 정리돼, 외장하드에 클라우드에 남아있을 뿐이다.


그렇게 남은 사진은, 남는다.

하나의 인장처럼 혹은 하나의 신호처럼.



종종, 기억을 두둔하고 싶어 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느 날의 기억은 이리저리 각색된다.

해가 좋던 날이 봄날이었다가 여름이 되기도 하고,

먼 곳을 응시하다 뛰쳐나간 고양이가 내 발목에 몸을 비비기도 한다.

기억에선 그런 것들이 가능하다.


그래서, 나의 기억은 나의 기억을 두둔하고 싶어 한다.

그건, 예전의 스스로에 대해 각별히 품고 있는 편애이자,

하나의 이야기에 질려 여러 결말의 이야기를 갖고 싶어 하는 예전의 기억에 대한 호의이다.



도무지 낡지 않는 사진 속 그 시절을 보면서,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별자리를 상상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중에도 유유히 자신의 좌표를 숨긴 별들의 선(線).


남아있는 사진들을 겹쳐보면 비슷한 선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주저하며 떠난 여행에서 담아온 사진들의 선은 더 유려할 것이다.



다짐으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걸 이제 알지만,

먼지와 바람이 묻어있는 오랜 사진들을 하나씩 꺼내볼 생각이다.


사진 속의 어느 길에서 떠다니는 먼지와 바람이,

정직한 사각형의 프레임을 돌아 나와 지금의 시절로 넘어올지 모른다.

하나의 문장부호처럼 혹은 하나의 반음(半音)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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