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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Apr 19. 2022

길을 잃으려던 기억만으로 충분할지 모른다

#인도여행 B컷

"내가 너무 지나친 질문을 했나 보죠?" 하고 그녀는 말하며 선글라스를 통해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 "질문하는 건 나쁜 게 아냐. 질문을 받게 되면 상대도 뭔가를 생각하게 되거든."


-단편소설 「태엽 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中, 무라카미 하루끼





일부러 길을 잃을 때가 많았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의 여행에선 그게 쉬웠다.


누굴 만날 약속도, 딱히 보고 싶은 장소도 없는 도시였다.

대략의 방향을 잡은 뒤 가이드북의 조악한 지도를 덮었다.


한낮의 볕이 흙먼지에 반사돼 온 거리에 퍼지는 시간이었다.

몇 대의 오토바이 릭샤가 외국인인 나를 알아보고 어디로 가는지 물었지만,

대충 웃으며 얼버무렸다. 흥미가 깊지 않은 그들은 금세 떠났다.



길은 아름답지 않았지만 다행히 지나치게 지루하진 않았다.


작게 포장된 세탁세제 봉지와 과자 봉지가 늘어진 좌판과,

퍼석해 보이는 사탕수수 다발과 묵직한 주스 기계를 가진 노점을 지났다.

개들은 인도(印度)의 다른 도시에서처럼 말라있었고 꼬리를 흔들지 않았다.


걷다가 무료해졌을 때, 작은 그늘을 가진 가게에서 병에 담긴 탄산수를 마셨다.

주인은 예의 언제 씻었을지 모를 칼로 녹색의 라임을 반으로 잘라 병에 넣어주었다.



당시에 썼던 수첩엔 도돌이표 같은 말들이 많다.

별 볼 일 없는 주제에 대해, 별 볼 일 없는 통찰력을 부리려던 말들은 주로 질문이었다.


군대에 다녀온 후 휴학을 하고 떠난 여행이었기에

앞날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염세를 과장한 억지 질문들에 확신은 없었고,

짧게 적어놓은 대답에는 주저함이 가득했다.


이국(異國)의 도로 위에서 그런 질문에 지칠 때면,

가이드북을 덮고 잠시 길을 잃었다. 요행을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천성이 겁이 많은 나는,

몇 시간 뒤에 스스로에 대한 미지를 거둬들이고,

숙소로 식당으로 버스터미널로 찾아들어갔다.



어느 아침에 버스를 타고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유적에 갔었다.

말없이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주저앉아 다리 쉼을 하면서 보니,

출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오토바이 릭샤가 한 대 있었다.


주로 단체관광객들이 버스를 타고 왔다가는 곳이었기에,

나로서는 버스를 타거나 릭샤를 타고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아마 릭샤의 기사는 그걸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둘 중 하나가 먼저 가서 흥정을 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나도 그도 오랫동안 서로 바라보기만 했다.

의욕이 말라버릴 정도로 햇볕이 강한 오후였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둘 다 타인에게 말을 거는 걸 꺼려하는 성격이었을 수도 있다.


결국 기사가 느릿느릿 일어나 시동을 걸고 내 쪽으로 왔다.

어디로 갈 거냐는 그의 질문에, 나는 한참을 생각하느라 답을 하지 않았고,

그는 기다려주었다.

역시나 대답이 말라버릴 정도의 강한 햇볕 때문이었을 수도,

둘 다 타인의 침묵에 익숙한 성격이었을 수도 있다.


평소와 다르게 한 번에 흥정하고 오른 릭샤를 타고 돌아가는 길,

끝없이 이어지는 낡은 오토바이의 소음과 흙먼지 속에서 난 안도했다.



누구도 나에게 신경 쓰지 않 날들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고,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들은 가이드북의 지도처럼 조악할 것이다.


그럴 때면 대답을 생각하는 척하면서, 잠시 길을 잃으면 된다.

몇 시간 혹은 며칠의 방황이 절묘한 답을 가져다주진 못할 테지만,

질문과 무관한 뭔가가 두서없이 떠오른다면 그걸로 된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길을 잃으려던 기억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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