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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Apr 21. 2022

성실을 증명할 나이를 지나

#치앙마이 여행 B컷

나이가 들수록, 많은 짐을 나르고 싶지 않은 까다로운 동물처럼,

우리가 가장 먼저 내던진 기억은 가장 좋아하지 않았던 것들일까,

아니면 가장 무거운 것들일까, 그도 아니면 가장 쉽게 내려놓을 수 있는 것들일까?


-소설 「검은 책」中, 오르한 파묵





종종 겁이 난다.


말을 하다가도 덜컥. 생각 없이 웃다가도, 술잔을 비우거나 운전을 하다가도 덜컥.

그럴 때면 중간에 하던 말을 끊고 경청 모드로 들어가거나,

혹시 누가 알아채지 않았나 싶어 괜히 진지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곤 한다. 


공포라기보다는 불확신에 가까운 이런 감정에 딱히 구체적인 대상이 있는 건 아니다.

별다른 상황이 벌어지거나 누군가의 말이 특별히 날카롭지 않아도 이럴 때가 많으니까.


원래의 조심스러운 성향 탓으로 돌리기에도 애매하다.

이런 변화는 근래 1~2년 사이에 나타났고,

난 자연스럽게 받아 들... 이기는커녕 여전히 당혹스러우니까.



이런 변화는 '지금의 나'를 '예전의 나'와 구분하는 데에서 오는 듯하다.


예전의 나는 결정된 것보다 결정할 것들이 많은 세상에 있었고,

남들이 해야 한다는 무엇을 가볍게 무시해도 제 잘난 맛에 살 수 있었다.

체력과 의욕은 금방 충전됐고, 나 대신 결정해주는 누군가에게 아무런 생각을 던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주저한다.


지금보다 어린 나이의 내가,

하나의 선(線) 너머에 있다는 생각은 그리 즐겁지 않다.

그 선을 넘어온(혹은 넘어왔다고 착각하는) 나는,

어물쩍이라도 선을 넘어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지금의 나를 과거의 나와 비교해가며, 조급하고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여기는 건

일종의 강박이 아닐까 싶다.


어렸을 땐 무엇이든 열심히만 하면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나의 성실만 증명하면 스스로를 꽤 근사한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렇게 사는 건, 뭐랄까 지나치게 순진해 보인다.


과거라는 긴 시간을 축적해 온 지금의 나는

뭔가 이루었음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 시달린다.


말하자면, 성실을 증명할 나이를 넘었다는 자각이랄까.


그래서 과거의 기억은 과거에 내려두고,

성실 외의 것을 증명하기 위해 고민한다.

그러다 보면, 관조를 가장한 무기력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과거의 나를 별개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과거의 나를 버리고 살고 있는 게 아니다.

매일매일 새로운 기억이 들어오기 때문에 오랜 기억이 잠시 자리를 비켜주는 것뿐이다.

지금의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무겁다고, 내려놓기 쉽다고

과거의 나를 무책임하게 내던지지 않는다.


성실이 아닌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 기를 쓰다가,

어느 불면의 밤에 마주치게 되는 게 하나밖에 없는 나의 무표정한 얼굴이라면,

증명 같은 건 아예 생각하지 않는 게 속편하지 않을까.  


과거의 내가 가지고 있던 기세가 지금보다 못하다는 손쉬운 질책보다는,

그래서 새롭게 만들어가는 누군가들과의 기억이 

과거에의 강박으로 인해 훼손되는 걸 방치하기보다는,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내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게 훨씬 편한 방법이다.



한 팟캐스트에서 진행자가 말했다.

좀 살아보니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나도 대단하지 않고 다른 사람도 대단하지 않다"라는 사실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어려운 관계도, 지나친 주눅이나 우월감도 없어진다고.


같은 얘기를,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예전의 나도 대단하지 않았고 지금의 나도 대단하지 않다,

혹은, 예전의 나도 괜찮았고 지금의 나도 괜찮다 식의 규정.



여행을 할 때마다 오래된 골목을 보면 마음이 편해지곤 했다.


그런 골목들은 으레 제멋대로였다.

여기저기 고쳐 쓰느라 색과 재질이 부분별로 제각각인 도로와 담벼락들,

모나지 않은 소음은 서로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

적당한 간격을 두고 서로 비켜가는 자전거, 오토바이와 자동차들.


골목은 골목이라는 이유만으로 별다른 규칙 없이 존재하지만,

아마 그런 자유로움 자체가 오래된 골목의 규칙일 것이다.



성실을 증명할 나이가 지났다는 생각이 들면,

오래된 골목을 걷듯 하면 될 일이다.


걷는 사람이 이어지는 한 골목은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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