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0시, 교토에서 길 잃으면 생기는 일

기억 없는 그날의 기억

by 김남우

지난 이야기

일본 영화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를 보고 즉시 일본으로 떠난 나는 여행 첫날부터 버스를 찾지 못해 늦은 시각 숙소에 도착한다.


정상적인 사고라면 밤 9시, 깜깜해진 교토 거리를 혼자 버스타고 가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영화에 미쳐있던 나는... 어둑해진 교토 길거리를 혼자 걸으며 교토 부립 식물원으로 향한다.




EP 2. 깡이 좋은 거니 생각이 없는 거니?


#1 지금 생각해보면 정신이 나가있던 것 같다


놀랍게도 이 날 찍은 영상과 사진은 전부 사라졌다.

핸드폰 갤러리와 카메라 SD 카드를 몇 번을 뒤졌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편집해서 올린 유튜브 영상마저 계정을 삭제하면서 같이 사라졌다.


그래서 내가 이 얘기를 할 때면 모두들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숙소를 나와 걷던 밤 9시 교토 골목길의 기억이 생생하다.


야심한 밤거리 대로변까지는 3블록 정도 걸었던 것 같다.

숙소에 그렇게 외곽은 아니었지만, 밤장사가 드믄 교토의 특성상 거리는 매우 조용했다.

왼쪽 앞에서 긴 치마를 휘날리며 자전거 하나를 나눠탄 여학생만이 유일한 내 길동무였다.


'일본은 좌측 통행이라서 자전거도 왼쪽으로 타는구나.'


그당시의 나는 겁이 없었고 여학생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니다, 분명히 했다. 그 날의 기억은 잊히지 않으니...


골목을 지나자 대로변이 나왔다.

나는 우측으로 잠시 걷다 길을 건너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모든 것이 일찍 마치는 교토였지만, 버스운행 만큼은 끝나지 않았다.


버스에는 두 명의 승객이 있었다.

출국 첫 날부터 다사다난한 날을 보낸 나는 하차문 바로 뒤에 앉았다.

그렇게 목적지에 도착하길 바라며 잠시 꾸벅꾸벅 졸았다.




#2 인생사 쉬운 거 하나 없네!


꾸벅꾸벅 졸다 눈을 떴을 때 이상한 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지도상으론 우회전만 해야 할 노선이었는데 버스는 좌회전을 했다.

그 순간, 나는 미어캣처럼 고개를 쭉 내밀고 창밖을 바라봤다.


버스는 내 불안 따윈 아는 체도 없이 지하 차고지 같은 곳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이윽고 버스가 줄지어 선 주차장 같은 곳이 나오더니 문이 열리고 승객들이 하차했다.

나도 눈치껏 따라 내렸다.


‘어떡하지.’


그때 들었던 생각은 단 하나였다.
당황스럽고 패닉이 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차고지 불은 밝았고 나와 같이 환승을 기다리는 승객들이 많았다.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차고지는 마치 지하철의 스크린도어 같았다.

버스가 들어오면 사람들은 작은 문으로 나가 하나둘 탑승했다.


나는 일단 다른 승객들을 따라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구글맵을 켜보니 다행히 돌아가는 노선이 있었다.


배터리는 얼마 남지 않았고 더는 화면을 오래 볼 수도 없었다.

불안하고 초조했다.
내가 의지할 사람은 그저 이름모를 옆자리 승객들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내가 기다리던 버스가 들어왔다.

나는 숨을 고르고 이번엔 정말 마지막이길 바라며 버스에 올랐다.



#3 이럴 거면 왜 왔을까


이때까지는 당황스럽긴 해도 큰 위협은 느끼지 않았다.

다만, 혹시라도 잘못된 길로 갈까 내내 창밖을 보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다행히 버스는 몇 정거장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 5분 정도 더 걸어 마침내 교토부립식물원에 도착했다.


하지만, 여기서 또 문제가 생겼다.

밤 9시가 넘은 시각, 식물원이 문을 열었을리 없었다.

영화에서는 주인공 커플이 저녁에 만나 사랑을 확인하는 장소여서 당연히 저녁에도 문을 열 거라고 생각했다.

알아보니 그건 크리스마스 기간에만 일시적으로 연다고 한다...


교토 부립 식물원에서 데이트를 하는 주인공 남녀


때마침 핸드폰 배터리도 5%에서 빠르게 닳더니 꺼져버렸다.

이제는 구글맵도 볼 수 없었다.


당행히 식물원 맞은편에는 아직 많은 가게들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나는 세븐 일레븐 편의점에 들어가 다급하게 외쳤다.


'핸드폰이 꺼졌어요.. 충전 좀 시켜 주세요.'


일본사회가 한국처럼 전기를 공짜로 빌려주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체면이나 예의를 차릴 겨를이 없었다.

일본어도 영어도 유창하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바디 랭귀지와 섞어가며 내 상황을 설명했다.


'아... No..'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싸늘했다.

그들을 원망할 생각은 없다.

다만, 당시 나는 단 하나 남은 동앗줄마저 끊어진 것처럼 절망감을 느꼈다.


그렇게 편의점을 나오는데 식물원 입구 옆으로 하천이 보였다.

청계천처럼 보도 옆으로 물이 흘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물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다른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있을까 하는 기대감이었다.


그러나 그 기대감은 이내 공포감으로 물들었다.

길도 보도블록이 아닌 흙밭이었다.

사람 한 명 찾아볼 수 없고 물소리만 들리는 어두컴컴한 길을 걷다가 문득 내 상황이 자각이 되었다.


'나.. 숙소 돌아갈 수 있나?'


그제서야 식물원에 들어가는 게 아닌 무사히 숙소에 돌아갈 수 있냐를 생각해댜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식감에 겁이 확 올라왔다.

나는 황급히 왔던 길을 되돌아 대로변으로 달려갔다.


이미 밤 10시가 넘은 시각, 나는 버스로도 족히 20분은 왔던 거리를 되돌아가야 했다.

버스 번호는 기억하지만, 반대로 탄다고 숙소에 도착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만약에 버스를 잘못타 다른 곳에 내린다면 돌이킬 수 없다 생각한 나는 과감한 결단을 내린다.


"왔던 길을 그대로 걸어가자!"


그렇게 핸드폰도 없이 나는 목숨을 건 여정을 시작했다.


'나 살아돌아갈 수 있는 거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