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성시경을 찾은 이유

난 슬픈 날이면 성시경 노래를 들어

by 김남우

언제나 영어는 내 발목을 잡는 방해꾼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영어 듣기 평가 시간만 되면 너무 심하게 떨어 유학파 친구가 달래줄 정도였다.

수능성적도 다른 과목은 1,2등급이 나올 때 영어는 4등급이 나왔다.


영어는 내게 아킬레스건이자 동시에 언젠가 꼭 넘어야 할 산이었다.

영어 잘하는 친구들이 부러웠고 유창한 영어실력이 가져다주는 기회를 나도 얻고 싶었다.


내가 다닌 대학은 교환학생 파견 학교가 몇 없었다.

그중 미국 대학은 단 두 곳, UC 버클리와 존스홉킨스 대학교뿐이었다.

토플 점수를 보는 다른 대학과 달리 UC Burkeley는 토익점수 800점 이상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세웠다.


20190623_153810.jpg UCLA

그렇지만 영알못인 나에게는 그마저도 벅찼다.

다섯 번 넘게 시험을 봤지만 800점은 한 번도 넘기지 못했다.

최고 점수는 790점.

결국 버클리에 가지 못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했던가.

미국을 가보고 싶다는 내 바람을 들어주고 싶으셨는지 교환학생을 갈 수 있는 마지막 해에 UCLA가 추가됐다.

첫 해 특혜로 정식 토플 대신 학교 자체 모의 토플 550점 이상이면 지원이 가능했다.


나는 시험을 보기 위해 인천에서 대구까지 KTX를 타고 내려갔다.

그리고 결국 553점을 받아 UCLA 교환학생으로 선발되었다.




EP.1 난 슬픈 날이면 성시경 노래를 들어



#1 거리에서


교환학생 합격 소식을 들은 날 나는 정말 크게 소리를 질렀다.


“미국에 공부하러 간다고? 내가?”


그때만 해도 미국에서 석·박사를 밟겠다는 꿈을 품고 있었기에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게다가 생애 처음으로 태평양을 건너 지구 반대편으로 향한다는 사실까지 더해지니 설렘은 말 그대로 최고조에 달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영어를 듣기도 말하기도 버거운 내가 미국에서 살아남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특히 수업이 문제였다.

나는 생명전공으로 모교에는 없는 ‘유전학’ 수업을 신청했다.


같이 온 동기 두 명도 처음엔 함께 들었지만 미국식 수업의 매운맛을 맛보곤 며칠 만에 포기했다.

나는 꼭 듣고 싶었던 수업이었기에 혼자 남았다.

하지만 매 수업이 후회의 연속이었다.


전문 용어는 낯설고 교수님이 말하는 속도는 너무 빨랐다.

기숙사에 돌아와 복습해 보면 이미 한국에서 배웠던 내용임을 깨닫곤 했지만 낯선 용어 탓에 이해가 늦었다.


20190720_200052.jpg 조슈아트리 국립공원

무엇보다 가장 큰 고비는 ‘토론 수업’이었다.

정규수업 시간이라고 대화를 안 시키는 건 아니지만 토론 수업시간이 따로 있었다.


첫날 나는 꿀 먹은 벙어리였다.

미국 학생들과 국제학교 출신 중국인 유학생들이 거침없이 의견을 주고받는 사이 나는 입을 열지 못했다.

한국에서도 질문 한 번 하지 않던 내가 영어로 내 생각을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1시간 반을 있는 둥 없는 둥 쥐 죽은 듯이 있다 기숙사에 돌아오는 길에 눈물이 핑 돌았다.

힘들게 꿈꾸던 교환학생 생활이었는데 수업 하나조차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내 영어는 참담했다.


그때 처음으로 성시경의 노래를 들었다.

‘거리에서’, ‘너의 모든 순간’, ‘넌 감동이었어’ 그의 노래를 닥치는 대로 찾아들었다.


낯선 땅에서 한국어가 그리울 때면 성시경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아줬다.

불안하고 외로울 때면 성시경의 노래는 나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었다.

돌아오는 날까지 한국이 그리울 때면 성시경을 찾았다.


그때 처음 노래가 가진 치유의 기능을 알았다.

언어도 문화도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24시간을 보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큰 에너지를 소모했다.

그때 성시경의 목소리, 그리고 한국 노래는 그저 같은 언어라는 이유만으로도 내게 큰 위안이 되었다.


LA는 미국에서 가장 큰 한인타운을 품고 있는 도시다.

그곳의 이민 1세대들은 능숙하지 않은 영어로 길을 찾고 생활 전선에서 악착같이 버티며 하루하루를 살아냈을 것이다.


그런 분들에게 지금의 대한민국이 세계 무대에서 보여주는 문화적 영향력은 얼마나 특별하게 다가왔을까.
나는 감히 짐작할 수조차 없다.


그저 바라기는, 그분들이 먼 타국에서 내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문화를 소비하며 잠시나마 고향의 그리움을 달랠 수 있기를.


20190628_184919.jpg LA 한인타운에서 먹은 북창동 순두부



#2 세탁실에서 생긴 일


나에겐 6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하는 사건이 하나 있다.

기숙사 세탁실에서 벌어진 일이다.

너무 부끄러워서 그날의 다짐을 카톡 상태 메시지에 새겨둘 정도였다.


KakaoTalk_Photo_2025-11-20-12-06-23.jpeg 부끄러워서 남긴 카톡 상태 메시지


UCLA 기숙사에는 큰 공용 세탁실이 있다.

키오스크로 세탁기를 결제하는 시스템인데 모교에서는 각 세탁기에 직접 현금을 넣어 사용하는 형식이라 익숙지 않아 실수를 했다.


먼저 세탁기에 빨래를 넣고 나서 키오스크 결제를 해야 한다는 걸 깨닫고 결제를 하려는데

내가 쓰려던 세탁기를 한 중국 여학생이 먼저 결제해 버렸다.


나는 상황을 설명하고 다른 세탁기를 결제해 줄 테니 서로 바꿔 사용하자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한국어 문장이 맴돌았지만 ‘결제하다’라는 단어 하나조차 영어로 떠오르지 않았다.


"Ah.. Umm. I used... the..."


'하 씨, 세탁기가 영어로 뭐지?'


결국 나는 바디랭귀지를 총동원해 손짓발짓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다행히 그녀는 이해하고 미소를 지으며 다른 세탁기를 선택했다.


그 여학생의 세탁기를 결제하고 나는 너무 부끄러워 바로 세탁실을 뛰쳐나왔다.

기숙사 방으로 돌아온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있었다.

너무 창피했다. 정말, 너무 한심했다.

그리고 이 날을 두고두고 잊지 않겠다는 생각에 카톡 상태 메시지에 내 다짐을 적었다.




해피엔딩이라면 이때부터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적어도 친구들과 프리토킹은 될 정도로 성장했다는 서사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 영어 실력은 이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한 번 더 교환학생을 다녀왔지만 취업에 필요한 오픽 점수조차 맞추지 못했다.

몇 번이고 시험을 다시 봐야 했다.


1564283198786.jpg 그랜드캐니언에서 한 컷


백수가 된 지금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그때 뭐 하나라도 열심히 했더라면 지금 인생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런 후회를 더는 하고 싶지 않아 내 여행을 글로 남기기 시작했다.


언젠가 여행작가가 되어 브런치에 꾸준히 글을 올릴 수 있다면

그때야말로 내 인생의 또 다른 첫 문장이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