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에도 사랑이 피나요?

하노이에서의 3일

by 김남우

내 나이 스물여덟, 정신은 아직 초등학생에 머물러있다. 적어도 연애에 관해서는 말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나는 한 여학생을 남몰래 좋아했다. 이제는 얼굴조차 흐릿하게 떠오르는 그 소녀를 나는 열렬히 좋아했고 옆에서 나를 지켜보는 개구쟁이 친구들이 이를 놓칠 리 없었다.


"너 OO이 좋아해?"


나는 흔하디 흔한 그 질문에 당연하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건 한 비극의 서막이었다. 친구들은 내 번호로, 혹은 그 친구 번호로 서로에게 장난 문자를 보내 놀리기 시작했고 끝내는 여러 명이 달려들어 나를 그 친구 반으로 데려갔다.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던 나는 짝사랑하던 친구가 보이자 부끄러움에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모두를 뿌리치고 도망쳤다.


이후의 기억은 흐릿하다. 다만 이 한 장면이 너무 강렬했던 탓인지, 그 순간 이후로 나에게 ‘감정에 솔직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누군가를 좋아해도 잘 말하지 못했고 연애와 담을 쌓고 지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과연 존재하긴 하는 걸까?’하는 의문까지 들었다.


"다들 운명적인 찌릿한 감정을 느껴서 연애하는 건가?"


그렇게 나는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공주처럼 운명적 짝을 얌전히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연애를 오래 하지 않다 보니 한 번의 연애에 거는 기대는 점점 더 높아져만 갔다.




이맘때쯤 베트남 여자애 한 명을 알게 됐다. 당시 나는 인스타그램에서 사진 계정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가 먼저 팔로우를 하고 DM을 보냈다.


엄격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자랐던 탓에 어플로 누군가를 만난다는 데에 부정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귀여운 베트남 여자애라니…’ 사랑보다는 외국인 여사친을 갖는다는 호기심과 설렘이 더 컸다. 우리는 종종 DM으로 안부를 주고받았고 가끔은 페이스북 영상통화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영락없는 ‘썸’이었는데 연애세포가 죽을 대로 죽었던 나는 그 기미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그 친구에게 더욱 호기심이 갔던 이유가 있었다. 당시 나는 4개월 뒤 군입대를 앞두고 있었고 종강 후에는 베트남 하노이로 여행을 갈 계획이 있었다. 알고 보니 그녀 역시 하노이에 살고 있었고 '하노이 대' 우리로 치면 서울대에 해당하는 명문대 학생이었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궁금증은 커졌고 우리는 내가 하노이에 머무는 동안 직접 만나보기로 했다.


그렇게 1월, 한국과는 달리 선선한 하노이 공기 속에서 우리는 처음 만났다. 어색했다. 남중·남고를 거쳐 대학에서도 여사친들과 자연스럽게 지내지 못하던 나에게 외국에서 처음 보는 여성을 홀로 만나는 일은 낯설고 두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수화물을 찾지 못해 오래 기다렸을 텐데도 공항에서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MBTI 극 I인 나는 고등학교라는 집단을 벗어난 뒤로부터는 누군가와 자연스럽게 친해지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강제로 묶인 소속감이 없다 보니 대화와 교류를 통해 연대감을 만들어야 했지만, 언제나 겉돌 뿐이었다.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은 처음 만난 상대에게도 어색해하지 않고 쉽게 녹아드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이 바로 그 친구였다. 어색해하는 내가 무안해질 정도로 공항에서 숙소로 이동하는 택시 안에서 내내 나에게 말을 걸고 하노이 시내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지금도 공산주의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진 않지만 그 당시 내가 가진 이미지는 '공산주의=북한'이었다. 때문에 베트남 사회도 김 씨 일가가 독재하는 북한 사회처럼 매우 경직되고 사람들도 어두울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하노이에서 만난 베트남 사람들은 내가 한국인이라고 말하면 박항서를 외치며 반가워했고 밝고 쾌활했며 현재를 즐길 줄 알았다. 그 친구 역시 그랬다. 쭈뼛대는 나를 데리고 다니며 사진도 찍어주고 맛집도 알려주었다.


한 가지 기억나는 일화가 있다. 내가 갔을 때가 마침 베트남 학생들의 졸업 시즌이었다. 교복이나 전통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 모습이 신기해 구경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가 내 표정을 본 모양이었다. 갑자기 지나가던 남학생 한 명을 붙잡고 나와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그 남학생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알겠다”라고 답하곤 나와 어색하게 사진을 찍어주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조금 웃음이 난다.


20200112_111212.jpg 베트남 졸업생과 한 컷


그 뒤로 돌아오는 날까지 하노이에 머문 3일 동안 우리는 거의 계속 함께 다녔다. 서로 좋아한다거나 연인이라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연인처럼 거리를 걸었다. 공산주의는 딱딱하고 무서울 것이라는 내 편견과 달리 적어도 그 안에서 살아가는 그녀만큼은 나보다 더 부드럽고 따뜻하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곧 군입대를 준비했다. 머리를 깎고 훈련소에 들어가니 현실이 또렷하게 다가왔다. 우리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었고 나는 군대 안에 있었다. 그 누구도 "사귀자"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 만남의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생각했다. 그렇게 내 상황을 설명하고 우리는 3일간의 만남을 끝마쳤다.




누군가에게는 코웃음 날 잠깐의 인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편견을 거두게 만든 아주 소중한 경험이었다. 정치 체제는 다르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오히려 매일의 결핍을 느끼며 더 큰 것을 좇는 나보다, 하루하루 소소한 기쁨을 찾으며 그 순간을 즐겁게 살아가는 그들이 더 행복하고 건강해 보였다.


그렇게 내 인생에 잠깐 찾아온 사랑은 내 편견을 깨뜨리고 흔적만 남긴 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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