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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까멜리아 Nov 10. 2024

정숙씨

변화

매일아침 일어나면 루틴처럼 하는 일들이 있는데, 이불정리하고, 기억나지 않을 만큼 오래된 스타벅스 숏 사이즈 머그에 물을 받아 말린 작두콩 조각 하나를 퐁당 넣은 후 전자레인지에 1분 돌린다.


따뜻과 뜨거움의 중간정도가 된 작두콩차를 홀짝홀짝 아침 준비하며 마신다. 아침식사가 끝나면 다시 정수기에서 물 한 컵을 받아 커피머신에 넣고 캡슐커피 하나를 쪼르륵 내려 마신다. 커피가 내려지는 동안 아이들 텀블러에 물을 담는다.


우리 집 정수기는 말 그대로 ‘정수’, 물을 걸러주는 기능만 있고 냉수나 온수, 얼음이 나오는 기능만 없다. 플레인 그 자체다.


우리 집에 정수기가 처음 등장한 건 6년도 더 전이다. 그전까지는 마트에서 생수를 사다 먹었는데, 한 번에 2리터 들이 6개 묶음 두 개씩 구입했다. 남편과 함께 마트에 가서 사 오거나 남편이 바쁠 때면 배달을 시켜서 먹었다.


생수라는 게 무게는 많이 나가지만 가격은 저렴하다 보니 배달을 위한 최소비용을 맞추려면 다른 물품도 함께 구입해야 했다. 한번 시킬 때 생수만 24kg, 여기에 다른 물품까지 합치면 우리 집으로 배송되는 무게만 족히 30kg 가까이 됐다. 배송받을 때마다 기사님께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물을 배송받은 어느 날, 지나가는 말로 남편에게


“다음부터는 물은 우리가 사다 먹어야 할 것 같아. 아저씨한테 너무 미안하더라고.”


라고 했는데, 그날 따라 남편이 기분이 나빴던 건지, 그 무렵 우리가 사이가 별로 안 좋았던 건지 몰라도,


“나한테는 안미안하고? 나도 무거워.”


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뭐지? 이 반응은? 전쟁 선전포고 같은 건가?’

‘그럼 앞으로 끓인 물 먹던가! 끓인 물도 잘 안 먹으면서!!! ’


라는 반격이 입 밖으로 나갈 뻔했으나, 아이가 잠들지 않은 시간이었다. 당시 나름의 육아 원칙이,


‘화 나는 일 있어도 아이 앞에서 언성높이고 싸우지 말자. 잠들면 싸워보자.’


였기 때문에 참았다. 이 방법의 순기능은 순간의 화를 참는다면 대부분의 싸움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아이 잠든 후에


‘자, 이제 싸워보자. 아까 뭐라고?!’


할 일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아이를 재우며 핸드폰을 들어 정수기를 알아봤다. 5년 약정, 셀프관리형 정수만 되는 상품은 한 달 13,900원이었다. 카드할인 이런 거 아무것도 필요 없이 그저 13,900원. 생수 비용에 비한다면 월등히 높은 가격이었으나, 가정의 평화를 위해 기꺼이 쓸 만한 금액이라 판단했다.


‘이거다’ 그때 바로 예약을 했다.


아이가 잠들고 난 후, 남편에게 통보했다.


“우리 이제 정수기 쓸 거야.”


정수기 설치기사님이 오신 날, 셀프관리법에 대해 알려주셨다. 정수기 필터 교체법과 교체주기 등이었다. 정수기 필터는 4개가 들어가고 3개월마다 오는 필터와 6개월 마다 오는 필터가 있으니 때 맞춰 교체하면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1년에 한 번은 방문하셔서 점검과 필터교체를 해주신다니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과정이었다.


버튼만 누르면 물이 나온다. 콸콸은 아니지만 졸졸 나온다. 더 이상 생수를 사러 가지 않아도 된다. 아이도 스스로 물을 마실 수 있다. 한 달에 13,900원으로 모신 정수기, ’정숙씨‘ 덕분에 한 층 윤택해진 삶이 좋았다.


몇 년 지나자 정수기 관리기사님이 오셔서 더 좋은 제품을 추천해 주기 시작했다. 위약금 없이 갈아탈 수 있고 냉수와 온수가 나온단다. 대신 한 달에 내는 금액은 현재의 두 배 수준이었다. 그리고 다시 5년이 시작된다.


특별히 찬 물, 뜨거운 물을 마시지 않던 나였기에 나는 정수 기능만 있으면 된다며 거절했다. 시간이 지나며 매 달 내는 금액이 좀 인하됐고, 그 금액은 점점 더 줄어들어 6년이 지난 지금은 한 달에 8,900원, 9천 원도 채 내지 않는다.


가끔 영업전화가 오는데, 비용이 11,900원이고 정수만 되는 건 같지만 새 제품으로 갈아타라는 것이다. 오래되다 보니 내부 배관이 오염됐을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런 거 거르라고 필터가 있는 거 아닌가?’

‘필터가 못 거르면 수돗물 먹는 거랑 똑같지… ’


이런 생각으로 영업전화에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으나, 올해 들어찬 물을 찾는 첫째를 보며


‘냉수라도 되는 걸로 바꿔야 하나?’


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이 냉수를 아예 안 마시는 것은 아니다. 냉수는 냉장고에 있다. 남편은 늘 냉수를 마시는데 언제부턴가 본인이 마실 물은 따로 물병에 받아 냉장고에 넣어두고 마신다. 근데 올해 들어 첫째 아이가


“아, 더우니까 아빠 물 마셔야겠다.”


하는 빈도가 부쩍 늘었다. 둘째도 크면 본격적으로 찬물을 찾기 시작할 테니 그때가 되면 찬물이 나오는 정수기로 바꿔야겠다.


‘찬 물 마시는 건 몸에 좋지 않아.’


라는 말 천 번 해봐야 아이들 귀에 안 들어갈게 분명하다. 그때까지 최대한 오래오래 나의 플레인 ‘정숙씨’와 함께해야겠다.


요즘 같은 고물가에 월 만원, 만 몇천 원은 커피 두 세잔 가격이라 차이 별거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1회성이 아닌 5년 이상, 지금처럼 쓴다면 6~7년 고정으로 내야 하는 비용이기에 나 같은 헐랭이도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사실 정수기 교체과정이 귀찮아서도 한몫한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 결혼생활도 10년을 넘어가자 이것저것 바꿀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밥솥과 에어프라이어, 전자레인지, 식세기, 세탁기는 이미 한 번 바꿨고, 그 사이 건조기가 새로 생겼다. 아직 듬직하게 제 역할해 주는 냉장고와 정수기지만, 이들도 몇 년 안에는 바꿔야 하겠지 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바꿈의 사이클이 도래한 것이다.


가전들이 들고 나는 지난 10년 사이,


나는 무엇이 얼마나 바뀌었을까?

그것은 좋은 방향이었을까? 그 반대일까?


외형적으로는 살크업이 많이 됐고(?), 흰머리도 몇 가닥씩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그 외에 내면적으로는 어떤 부분이 변화했는가에 대해 생각해 봤다.


가장 큰 변화는 한 때 ’ 딩크 추구자‘에서 ‘내가 조금 더 젊고 건강했다면 셋도 낳았을 거야’로 변한 가치관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지난 10년간 나의 모든 변화의 기점은 아이들이었다. 변화한 가치관에 따라 책도 더 많이 보고, 마음의 양식을 많이 쌓는 만큼 실제 양식도 진짜 ‘양식’, 좋은 음식으로 잘 먹고 있다. ‘나’만 알던 과거에 비해 내 주변 사람, 사회에도 관심이 많아졌다. 이렇게 적고 보니 아이들이 태어나며 오히려 ‘나’라는 사람을 더 깊이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앞으로 10여 년이 더 지나 또 한 번 가전을 바꾸게 될 때는 어떤 부분이 달라져 있을까? 내일이, 내년이, 10년 뒤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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