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고뇌 사이

미셸 슈나이더

by 정작가

프랑스 문학평론가인 미셸 슈나이더는 자국의 문화 분야에서 문학이 제일 강세를 보이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탈리아, 일본, 독일, 영국 등에서 음악 엘리트가 득세하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라 최고 수준의 학교를 나와도 음악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음악과 처음 만난 순간이 궁금하다고 하는 인터뷰어의 질문에는 어릴 적 작고한 부친의 이야기를 꺼낸다. 한량이었던 부친이 하던 일이라고는 피아노 치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지만 모친은 바이올리니스트라서 바이올린을 권했지만 본인은 그것이 끔찍하다고 할 만큼 트라우마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반면 피아노 치는 일은 너무 좋아서 여덟 살에 그만둔 피아노를 공무원이 되고 나서도, 서른다섯에 다시 시작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피아노 교습소를 찾아서 출근 전 피아노를 한 시간치고 사무실로 출근했을 만큼 그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고 한다. 피아니스트들의 음반과 실연이 귀에 단련되어 있으면서도 정작 그 음에 맞게 피아노를 치지 못하는 스스로를 한탄하는 미셸 슈나이더는 문학가이면서도 음악을 잊지 못하는 예술가의 초상을 보여준다.


어릴 적 아버지가 치던 피아노곡이 작곡가 슈만의 작품이었다는 것은 그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슈만의 곡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를 미셸 슈나이더는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해 밝힌다.


고통에 찬 영혼과 내면의 깊이까지 다 담아내려면 음악가는 ‘악보대로 연주하는 수준’을 뛰어넘어야 한다.


미셸 슈나이더의 저작 『슈만, 내면의 풍경』을 통해 ‘고뇌’와 ‘고통’을 구별한 흔적, ‘아픔’과 ‘상실’이라는 단어에 배어있는 미세한 차이를 돌출하려는 그의 시도는 그에게 가해진 고통을 체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슈만은 태생적으로 고통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고, 그걸 음악으로 표현해 냈으며, 고통을 못 이기고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이런 진술은 그가 고통 속에서 머물렀던 시간을 환기시킨다. 아버지와 형의 죽음, 그리고 그들의 삶 속에서 슈만의 음악이 좀 더 각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미셸 슈나이더에게 있어 고통은 잊을 수 없는 환영으로 자리 잡기 때문이다.

평생 나를 따라다녔던 그 상실의 고통, 아픔을 음악으로 표현해 낸 슈만을 들으면 공감각적으로 통증이 전해진다.


될 수만 있다면 지휘자가 되고 싶어 하는 미셸 슈나이더는 아바도와 클라이버 같은 지휘자처럼 ‘불멸의 음악을 남길 수 있는 존재로 남고 싶기 때문’이라고 기술한다. 작가의 정체성을 가지고 다시금 음악가의 길을 되새겨 보는 그는 역할이 바뀌었다면, 다시 작가의 길을 소망하지 않았을까라는 반문으로 자신의 위치를 다시금 되새기기도 한다.


미셸 슈나이더와의 인터뷰 속에서 소스라치듯 드러나지 않는 고통을 예술로 감내하며 살아가고 있는 그의 본모습을 보면서, 일정한 지위에 오른 명사조차도 고통과 아픔 속에서 때론 정체성에도 휘둘리는 갈대 같은 존재로서 인간을 보게 된다. 누구나 그렇듯이, 결국 인간은 고통과 고뇌와 같은 정신적 감각의 예속물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게 된 것은 아닌지. 과거의 흔적이 지금의 존재를 흔들어도 결국은 그런 현실을 인정하며, 우리는 그저 나약한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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