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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불꽃처럼 맞선 자들

강부원 / 믹스커피

by 정작가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역사의 한 페이지조차 제대로 기록되지 못했던 이들의 발자취를 좇아가는 일은 나름 흥미로운 여정이었다. 역사는 승자들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다지만 <역사에 불꽃처럼 맞선 자들>이란 책을 읽어보면 과연 그럴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이 책에 소개된 이들을 보면 역사적으로 봤을 때 패배자들과 다름없었고,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잊힌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역사에 불꽃처럼 맞선 자들>이란 책의 제목처럼 여기에 등장하는 25명의 인물들은 주어진 환경에 굴하지 않고, 세상과 맞서 자기의 주체성과 정체성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다. 특히 1부 세상과 맞서 싸운 여자들에 소개된 9명 여성들의 이야기는 남다르다. 1930년대 일제 식민치하에서도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해 고공농성과 단식이라는 무기로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키려고 했던 강주룡을 비롯하여 열혈 독립운동가 정칠성, 조선 독립운동가들의 숨겨진 리더 남자현, 조선공산당 여성 트로이카로 알려진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 위안부 참상을 세상에 처음 공개한 김학순,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 유일하게 복직되지 않은 노동자로 알려진 김진숙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과 의지를 세상에 피력했던 용기 있는 이들이었다. 이들의 일화는 우리에게 필설로 형용하기 힘든 위안과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2부 최초의 도전을 감행한 자들에서 소개된 8명의 인물 또한 우리 근현대사에서 최초라는 타이틀로 다가온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김점동, 조선 최초의 비행사 서왈보, 우리나라 최초의 조선복재단기발명가 이소담 등은 각기 속한 분야에서 최초의 위치를 점유했지만 사람들에게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숨어있는 위인들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3부 시대와 불화한 열정과 분노에 소개된 사람들 또한 예술과 지식인의 영역에서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인물들이다. 여기에 소개된 인물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이는 유신정권과 개발독재가 낳은 괴물로 소개하고 있는 ‘무등산 타잔’ 박홍숙이다. 잔혹하게 4명을 살해한 살인자를 역사에 맞선 인물로 선정한 이유에는 그런 악마적인 행위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습속과 편견에서 벗어나 인간적인 삶의 가치를 갈구했던 한 인간의 분노에 나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다소 껄끄러운 책으로 분류될 수도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시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 대부분의 분량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세히 내용을 살펴보면 세상을 꿰뚫는 혜안과 시대를 앞서갔던 선구적인 가치를 읽을 수 있다. 역사 교과서에서 결코 찾아보기 힘든 에피소드로 가득 찬 <역사에 불꽃처럼 맞선 자들>을 읽다 보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역사의 전면에 화려하게 등장했던 이들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역사에 불꽃처럼 맞선 자들>에 소개된 25명의 인물들 중에는 개인적으로 다소 낯익은 이름도 몇 명 발견할 수 있다. 남자현과 박열은 각기 영화 <암살>과 <박열>을 통해 개략적으로 알게 되었고, 김진숙은 언론에서, 나운규는 교과서를 통해, 전혜린과 김승옥은 문학 작품을 통해 그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이렇듯 인생에서 스쳐 지나갔던 인물들의 실체를 좀 더 심층적으로 파고들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역사에 불꽃처럼 맞선 자들>로 인해 가능해졌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이 책은 ‘책은 도끼다’라는 명제에 부합되는 텍스트인 것만은 확실하다.


이 책을 읽는 방식은 인물 중심적이기 때문에 굳이 순차적일 필요는 없다. 관심이 가는 인물들을 택하여 읽을 수도 있고, 비슷한 시대를 엮어서 인물들에 접근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소개한 인물들은 호불호가 갈린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 책에 소개된 인물들 중에는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도 있고, 살인자도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단순히 이념적인 접근이나 범죄자의 프레임으로만 본다면 이런 이들은 당연히 책에서 언급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개개인의 신념과 의지를 가지고 당시 사회 주류에 편입되지 않은 상황에서 용기를 가지고 세상과 맞섰던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분명 이들의 날 선 도전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겠다. 저자의 주장을 인용해 보면 더욱 그렇다.


아무렇게나 잊혀도 무방한 이름은 없다. 이 책이 소개하는 스물다섯 명은 누가 뭐래도 20세기 한국사의 한복판에서 자신만의 규칙과 리듬으로 세상에 맞선 존재들이다. 이들은 주어진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이 세계의 모순과 부조리를 해결하고자 혼신의 힘을 다했다. 덕분에 세상은 조금씩 바뀌었고 역사의 물줄기도 방향을 틀었다. 어쩌면 한국 사회의 진보와 성숙은 이들의 ‘무대뽀’ 정신을 불쏘시개 삼아 이뤄졌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이 책을 더욱 신빙성 있는 텍스트로 여기게 하는 데는 해당 인물에 대한 역사적인 사료가 사진이라는 형식으로 진실성을 담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나운규를 소개하는 부분에서 삽입된 영화 <아리랑>의 ‘광인의 낫질’ 씬이라는 사진을 보면, 조그마한 사진에 불과하지만, 나운규가 역사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수전 손택의 <사진에 관하여>라는 에세이는 한 장의 사진이 미치는 영향력의 가치를 유추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역사에 불꽃처럼 맞선 자들>을 읽고 가장 큰 깨달음을 얻었던 것은 역사를 선과 악으로 규정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알게 된 것이었다. 한 가지 역사적인 사건을 가지고 획일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편협한 사고를 확장시킬 뿐이다. 이를테면, 고공투쟁자 강주룡을 기득권인 지주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타도해야 할 ‘악’으로 규정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핍박받는 노동자라는 상황에서 바라보면 강주룡은 남성도 하기 힘든 고공농성을 실천한 선구자적인 입장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세 손가락의 여장군인 독립운동가 남자현을 당대 우월적인 남성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평가 절하할 수도 있겠지만 객관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그는 분명 여성이라는 존재를 뛰어넘는 선구적인 독립운동가로서 자리할 수 있게 된다. 저자가 야누스와도 같은 천재 건축가로 소개하고 있는 김수근은 ‘공간’과 ‘대공분실’을 설계한 건축가의 두 얼굴을 가진 이로 상반된 평가를 내릴 수도 있다. 이렇듯 <역사에 불꽃처럼 맞선 자들>에 소개된 인물들은 획일적인 시선으로 평가를 내리기엔 극과 극을 달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역설적으로 이런 매력이 이 책의 가치를 높여주는데 일조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한 권의 책을 읽고 모든 사람들이 같은 평가를 내린다면 그것은 분명 책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한 것으로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의 가치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세상에 없던 아나키스트 커플’로 불리는 박열과 그의 애인 가네코 후미코를 들 수 있겠다. 저자는 이들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박열의 ‘개새끼’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린다.


사회적 금기와 당대의 언어 규율을 모두 깨뜨린 파격적인 시 「개새끼」는 젊은 시절 박열이 지향하는 삶과 품고 있는 사상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국가의 가치조차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던 아나키스트로서의 삶을 살아갔던 이들의 행보는 그 자체만으로도 파격적이었지만 그 어떤 예속에도 거리낌 없는 자유로운 영혼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측면에서도 시대의 가치를 초월한 선구적인 혜안의 소유자였음을 일깨우게 된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의건 타의건 간에서 세상이 정해놓은 규칙과 규율에 순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이 책에서 소개된 25명의 인물들은 그런 예속된 틀에 머무르지 않고, 각기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기존의 질서와 가치를 부정하고, 인간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했다는 점에서 선구적인 위치를 점유했던 사람들이다. 이 책을 통해 이들의 자유로운 의식과 시대를 초월했던 혜안을 공유할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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