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 스튜어트 감독(2010) / 미국
공포영화의 미학은 그걸 바라보는 긴장감에서 찾을 수 있다. <더 파이널>은 그런 면에서 그런 극적 긴장감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요즘 공포영화의 경향은 진정한 공포에 대한 심리를 자극하기보다는 시각적인 잔인성과 신체의 훼손등을 통한 극단적인 요소들을 포함하는 호러물에 가깝다. 이 영화에서 그런 공포의 극단을 자극하기 위한 장치가 사용되기는 한다. 하지만 공포영화가 주는 살 떨리는 여운이라든지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의 자극은 오직 시각에 의존할 뿐이다.
한 여자가 모자 달린 옷을 입고 식당에 찾아든다. 그녀의 얼굴엔 커다란 상처가 있어 보여주기 민망한 상황이다. 사람들은 그녀가 들어오자 수군수군거린다. 그 소리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그녀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탁자를 엎어버린다. 화면은 어느 캠퍼스의 교정으로 이동한다.
우리는 그녀의 상처를 쫓아간다. 달러를 내민 그녀의 손가락이 왜 잘라져 있는지, 남들에게 숨길 수밖에 없는 얼굴의 상처가 무엇으로 인해 생긴 것인지 그것을 파헤쳐가다 보면 우리는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한 현상을 목도하게 된다. 일본어로는 '이지메', 우리말로는 '왕따'. 우린 지금 영화 속의 왕따가 과연 어떤 식으로 따돌림과 굴욕을 당하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춰야 하니까. 대개 '왕따'들은 기득권세력들과 신체적인 특징이나 출신지가 틀리거나 괴롭힐만한 어떤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왜소한 체구일 수도 있고, 특정 종교를 믿는 신자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인종이 틀리거나 유난히 돋보이는 존재일 수도 있다. 여기에서는 적어도 그런 특징들이 발견된다. 소위 '왕따' 당하는 아이들의 일면을 보면 그들을 억압하는 애들과는 표면적으로도 판이하게 다름을 느낄 수 있다. 그건 그들이 함께하는 아이들과의 동질감을 벗어난 이유가 크다. 예를 들면 한 학생의 출신지가 인도이고, 황인종이며 체격은 왜소하다. 백인들 위주의 사회에서 타인종은 그 자체만으로서도 그들의 동질감에 위해를 가하는 암묵적인 존재이다. 그런 존재를 그들은 가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이유는 없다. 그저 대항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로써만 그들의 린치에 대한 정당성을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는 속담이 있다. 이들은 가해자들에게 지렁이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곧 엄청난 지렁이가 되어 아마존의 보아뱀처럼 그들을 삼켜버리려 한다.
지렁이들이 모였다. 그들은 엄청난 음모를 꾸민다. 그들에게 린치 당한 고통과 굴욕의 기억을 처절한 복수로 앙갚음하려 한다. 여기에서 파티는 그들에게 역설적인 행사일 뿐이다. 그들을 옥죄고, 고문하는. 파티를 통해 모인 아이들은 철저한 계획으로 준비된 왕따들의 먹이가 된다.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순간이다. 왕따들은 하나같이 가면을 썼다. 그들의 가면은 일그러져 있다. 튀어나온 눈의 피에로. 마치 나치를 상징하는 문양과 제복. 표정을 알 수 없는 하얀 탈. 그런 가면 속에서 기존의 가해자들에게 행하는 엄중한 경고와 공포분위기는 가해자들을 순한 어린양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마치 신의 힘을 빌어 심판이라도 하듯 그들에게 위해를 가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 공포이자 고통이자, 지옥의 한 장면이 되어 버린 것이다. 새로운 가해자들은 그들을 한 명씩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밀어 넣는다. 갖가지 고문의 도구가 난무하고, 그런 도구들은 실제로 그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적절한 도구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 이제 그들은 적어도 마을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꼼짝없이 죽음을 준비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진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할 수밖에 없다. 가해자들도 선언한다. 곧 날이 밝으면 여기서 자행된 끔찍한 일들이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그들의 고통이 세상에 낱낱이 알려질 것이라고.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친구도 아니고, 왕따로 인해 고통을 당했던 아이들이 아니라, 그들을 살육하는 악마로 변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위해를 가하면 가할수록 그들 또한 그들의 잔혹한 행위가 더 이상은 무의미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는 순간 그들은 하나 둘 주검으로 신성한 파티장에 어두운 그림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한국영화에도 요즘 들어 복수를 테마로 한 작품들이 등장하고, 그런 영화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추악한 살인마의 행적을 파헤쳐가는 추격자, 박찬욱 감독의 복수 시리즈-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최근에 개봉되어 화제가 되고 있는 '아저씨', '악마를 보았다.' 등 수많은 복수극들이 상영관을 피로 물들이고 있다. 그러면 이런 영화들이 흥행하는 요소는 과연 무엇일까? 선혈이 낭자하고, 인간의 극단을 달리는 폭력과 살인. 그런 것들로 인해 일상에서 느끼지 못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불완전한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참담한 현실 속에 마음속에 품고 있던 온갖 추악한 감정의 찌꺼기들을 '복수'라는 매개체를 통해 배설해 내고, 새로운 삶을 향한 노정에 진입하고픈 사람들의 바람이 함께 한 것은 아닐는지.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복수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 추악한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니 가하는 자와 피해자가 따로 없는 실패의 게임인 것이다. 성서에서도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라는 가르침이 있다. 이는 복수가 부르는 폐해를 사전에 차단하고, 용서를 통해 진정한 사랑의 가치를 구현하려는 종교적 의지로 해석할 수 있다. 수많은 선현들의 가르침 속에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 결코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어느 시대를 살아가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갈등은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산물이다. 이런 갈등을 해결해 나갈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좀 더 적극적으로 세상의 흐름에 동참할 수 있다. 그런 갈등의 근원을 찾지 못하고, 복수에 의존하여 삶을 방기 시키는 행위는 나의 삶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도 좀먹게 된다.
이 영화를 통해 피해자가 새로운 가해자가 되고, 또 다른 피해자가 새로운 가해자를 양산시키는 악의 순환구조가 얼마나 인간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 수 있는지 인식할 수 있었다. 상투적인 말이겠지만, 항상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것. 그런 사랑이 존재하지 않을 때 우리는 여지없이 악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파멸의 길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더 파이널>은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