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공부하는 인간 제작팀 / 예담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규정짓는 이유 중에 하나로 생각하는 특성을 꼽을 수 있다. 물론 짐승들도 나름 생각은 하겠지만 고차원적인 사고의 의식 작용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의 생각은 짐승들의 그것과 구별된다. <공부하는 인간>은 이런 사고의 고차원적인 응용인 공부에 주안점을 두고 KBS에서 방영된 <공부하는 인간, 호모 아카데미쿠스>를 책으로 펴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공부하는 인간>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왜 그토록 인간은 공부에 매달리는 것일까? 또 공부가 순수하게 학문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치열한 경쟁풍토에서 승자를 결정짓는 도구로 변질된 현실은 어떻게 봐야 할까? 이렇듯 다양한 공부에 대한 의문과 이를 통한 사유의 장을 마련함으로써 우리 사회는 물론 세계적으로 번지고 있는 공부의 열풍에 대해 진단하는 기회로 삼는다는 측면에서 <공부하는 인간>은 우리에게 시사점을 던져주는 텍스트라고 할만하다.
우리 사회에서 사교육 열풍이 분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아무리 정부에서 공교육을 정상화하겠다는 의지를 보여도 사교육 열풍을 잠재우기는 쉽지 않다. 이는 우리 사회가 인간의 다양한 가치를 오직 공부라는 한정된 틀에 재단하여 이를 통해 인간을 판단하고 서열화시키는 구시대적인 패러다임에서 아직 벗어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학문을 연구하는 요람인 대학이 어느새부턴가 취업을 위한 교두보로 기능하고 있는 현실을 봐도 그렇다. 이런 현상은 우리 사회가 고도 성장기를 넘어서 안정된 성장기로 접어들고 있는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단 이런 현상은 우리만의 일은 아니다. 점진적으로 자본주의 경제에 받아들이고 있는 대륙 중국이 그렇고, 일본 열도가 그렇다. IT 인재산실의 요람으로 불리는 인도 또한 예외일 수 없다. 이렇듯 국경을 초월한 공부전쟁은 그 예측범위를 확대하며 치열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동양인이 이렇듯 공부에 매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제작진은 이를 개인보다는 집단을 중시하는 고유한 동양인의 의식세계에서 찾고 있다. 독립성보다 관계성에 치중하는 동양인의 가치관은 남보다 우월한 가치를 지향하는 서양인과 대비된다. 이는 동양인의 학습 욕구가 독보적인 우위를 점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닌 그저 남에게 뒤처지지 않는 것을 기준으로 하는 학습 욕구에 근거한 것이다. 동양인의 공부는 가족과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에 합당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한 측면에서라는 이유가 크다. 반면 서양인의 공부는 개인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한 독립적인 존재로서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한 측면이 강하다. 이렇듯 공부는 내가 속한 집단이나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수행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과연 가난과 계급의 탈출구로서의 공부는 유효할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신화가 사라진 시대에 공부 또한 자본의 영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부의 대물림이 학벌의 대물림으로, 이런 학벌의 대물림이 다시 부의 대물림으로 반복되는 기형적인 사회 구조 속에서는 그저 소수만이 승자가 될 뿐이다. <승자독식사회>는 이런 사회의 모순점을 통찰하는 데 도움을 줄 만한 책이다.
공부에 관한 것이라면 유대인을 따라올 만한 민족도 없다. 유대인들의 대표적인 경전이자 율법서인 《탈무드》시대가 변천되어 오는 과정에서 축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형성된 지혜서로서 유대인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았다. 이를 통해 유대인들은 방대한 분량의 지혜서를 탐독하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유대인의 공부법은 그 방식에서도 차이가 난다. 암송과 암기 위주의 인도 공부법, 표준을 향한 공부로 경제대국을 일군 일본의 공부법, 교류의 공부를 통해 번성한 프랑스 공부법과는 달리 토론과 논쟁을 통한 공부 방식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부 방식을 통해서도 동서양의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암기 위주의 동양 공부법과 질문 위주의 서양 공부법은 각기 문화와 환경에 따른 영향에서 기인한 것이겠지만 그에 따른 효과도 틀릴 수밖에 없다. ‘주어진 상황이나 환경에 맞도록 공부 방식에 변화를 주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 제작진의 의견이다.
제작진이 에필로그에서 밝힌 것처럼 문명을 이해하는 하나의 문화코드로서 공부하는 인간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은 그동안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공부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전환하는 기회로서 작용했던 것이 사실이다. <공부하는 인간, 호모 아카데미쿠스> 제작팀이 공부 강국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인도, 중국, 미국, 프랑스 등의 나라들을 방문해 명문 학교들을 돌아보고, 그런 탐험을 통해 각국의 공부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준 것은 나름 의미는 행보라고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공부에 대한 지향점이 엘리트 교육, 명문 대학 위주로 성공과 출세를 지향하는 패러다임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전 지구적으로 인류의 평화와 공존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인간상 구현이라는 본연의 가치를 추적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느낌이 든다. 소수의 지배계급만을 위한 엘리트 인재 양성의 요람이 된 명문 대학은 과거 제국주의 시대 이전부터 식민지 정책으로 인해 막대한 부와 재화를 거둬들인 결과로 인해 형성된 산물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더군다나 세계적으로 부익부빈익빈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갈수록 치열해지고 좁아지고 있는 명문캠퍼스의 진입장벽은 공부에 대한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공부하는 인간>은 인간의 근원적인 탐구의지와 진리에 대한 가치를 탐색하는 공부 본연의 의미를 일깨워 주기보다는 남보다 좋은 일자리, 남보다 유리한 위치를 점유하고자 애쓰는 성공을 향한 공부에 몰입하는 현 세태의 모순을 제대로 진단하지 못한 측면이 강하다. 또한 소수만이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문을 향해 모두들 진입하려는 시도가 정당하다고 항변하는 듯하다. 마치 우리 교육이 성공지향적인 경쟁위주 교육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비록 말미에 ‘소통, 협력의 공부에서 미래를 찾다’는 장을 통해 공부에 대한 나름의 해법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그 지향점이 명문학교 인재, 즉 성공의 아이콘으로 귀결된다면 공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공부하는 인간>은 책 뒤표지에서 언급한 것처럼 ‘생존을 위한 공부’라는 콘셉트가 강하다. 그러다 보니 로뎅의 ‘생각하는 인간’이 떠오르기보다는 죽기 살기로 공부해야 하는 우리 교육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혹자는 사유와 사색도 좋지만 당장은 목구멍에 풀칠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니냐 라는 항변을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처럼 교육 수준이 높은 나라라고해도 행복지수는 그에 값하지 못한다. 물론 행복지수라는 것이 교육이라는 분야에 국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대를 이끌고 갈 젊은이들이 공부를 통해 성공과 행복 중에 하나를 좇으라고 한다면 과연 어떤 것에 비중을 둘지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지을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는 공감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성공을 위한 경쟁적인 방식의 공부에 대한 패러다임은 재고할 여지가 있다. 여하튼 <공부하는 인간>을 통해 잠시나마 공부에 대한 사유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