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by 정작가


톨스토이는 이 장에서 예술이 배타적이고 까다롭고, 조작적이며 흐리멍덩하게 된 것을 상류 계급 사람들이 신앙을 잃은 결과라고 기술한다. 민중적인 예술가의 작품은 누구나 이해되도록 말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하려 애쓰지만 예술가가 ‘예외적인 환경 속에 있는 일부 사람들’을 위해서 작품을 만들 때는 그렇지 않다고도 한다. 여기서 일부 사람들이란 교황, 추기경, 국왕, 공후, 왕비, 국왕 등을 지칭한다. 이들을 위한 예술은 일종의 암시(暗示)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으며, 애매성이 본질이라고 말한다. 신화와 역사를 인용한다든지 막연하거나 수수께끼 같은 것, 대중이 근접하기 어려운 것이 예술로 자리 잡았던 이유는 이런 소수 특권층에 한정된 예술 활동이 주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또한 테오필 고티에는 《악의 꽃》 서문을 인용하며, ‘진실을 될 수 있는 대로 배제’했다고 혹평을 하기도 한다.


이 장에서는 특히 톨스토이가 여러 작품들을 인용하며 소수를 위한 예술로써 애매함을 특징으로 하는 상황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시대의 예술가들은 니체나 바그너를 원용(援用)해, 구태여 몰취미한 대중 따위에게 이해될 필요는 없으며 오직 최상의 교양을 받은 사람들, 그러니까 영국 미학자들이 말하는 가장 교양 있는 사람들의 시경(詩境)을 불러일으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는 소위 예술이라고 일컬어지는 작품들이 소수 특권층을 위해서만 복무하는 현실을 비판한 것으로 보인다. 톨스토이의 비판은 몇 편의 서정시에 머무르지 않고, 산문시까지 그 범위가 확대되어 이어진다. 톨스토이는 시평(詩評)에서 전반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나는 그 의미를 전혀 알 수 없다’

‘난해하다’

‘구름 속을 헤매는 것 같아서 알 수 없다’

‘엉터리 비유나 말을 주워 모았다고밖에 할 수 없으리라.’


이런 부정적인 인식의 발로는 다음 같은 표현에서 더욱 표면화된다.


이들 시인이 활약하고 있는 사회의 예술이라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진지하고 중요한 일이 아니라 단지 위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시(詩)에 대한 비판은 그것이 시라는 문학 장르에 한정되지 않고 회화(繪畵) 부문에서는 이를 능가하고 있다고까지 기술하고 있기도 하다. 1894년에 파리의 전람회장을 방문한 어느 회화 애호가의 일기를 발췌한 내용 중에는 ‘부아가 끓어오를 뿐’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회화의 난해성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비판의 장르는 연극, 음악, 소설 분야로 확대된다.


예술은 더욱더 배타적으로 되어 가고 한편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점점 더 모를 것이 되어 버린다는 점뿐이다…예술이 극히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이해되며 더욱이 이 선택된 사람들의 수도 자꾸만 감소되어 가는 과정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예술의 난해성을 톨스토이는 민중 예술로부터 분리된 상류 계급의 예술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상류 계급의 예술이 민중 예술로부터 분리되자 불현듯 나타난 것은, 예술은 대중에게 이해되지 않더라도 그대로 예술일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이처럼 예술을 대중성에서 멀어지게 하고, 예술 자체로서의 예술을 지향하는 흐름에 대해 톨스토이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펼치기도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이해되지 않더라도 훌륭한 예술일 수 있다는 주장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당하지 않다. 거기서 나오는 결론은 해로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이 주장은 새삼스레 그 불합리성을 충분히 밝혀낼 수 없을 만큼 널리 보급되어 우리 생각에 침투해 들어와 있다.


이런 톨스토이의 생각은 몇 장에 걸쳐 다소 장황하다 싶을 만큼 그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런 견해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위대한 예술 작품은 그것이 만인에게 받아들여지고 이해되기 때문에 비로소 위대한 것이다.


예술의 본질적인 가치를 추종하는 이런 거장의 인식은 소수 특권층의 예술관을 정조준하기도 한다.


학식이야 깊지만 타락하여 종교를 잃은 사람들은 진정한 예술 작품을 이해하는 데 번번이 실패한다.


여기선 주안점은 학식이 깊은 자들을 에둘러 비판한 것인지, 아니면 학식이 있더라도 종교를 잃은 사람들이 작품에 대한 몰이해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는 것으로 말하는 것인지 다소 모호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비판은 대중이 이해하지 못하는 예술은 예술도 아니라는 단호한 주장으로 이어진다.


현대의 예술가들은 흔히, 매우 뛰어난 예술 작품은 뛰어나다는 이유만으로 대중에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오히려 대중에게 예술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그 예술이 대단히 졸렬하든지 또는 차라리 아예 예술이 아니든지 둘 중에 하나 때문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장은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통틀어 가장 내용이 길다. 이는 수많은 시와 산문들을 실질적으로 인용하고, 직접 작품을 감상하는 과정을 통해 그 난해성을 체험케 한 의도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저자인 톨스토이는 말라르메의 시를 몇 편쯤 읽고, 시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했다고 일갈하기도 한다. 이런 톨스토이의 견해는 당대에는 제법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다가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복잡다단한 현대 사회에서 예술품의 가치를 천편일률적으로 재단하는 것은 오히려 표현의 자유를 훼손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고로 이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도 있기는 할 것이다. 현대 사조를 보면, 예술 작품에서 어떤 의미를 찾기보다 오히려 그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 새로운 표현 양식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만큼 다양한 개념 예술이 혼재하고 있음을 목도할 수 있다. 이런 예술에 대한 견해가 시대가 흐르면서 바뀔 수밖에 없는 것은 그만큼 시대 발전과 변화에 따른 예술의 가치가 그 효용성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작금의 상황에서 톨스토이의 예술론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갈수록 심화되어 가는 자본의 영향력으로 인해 그가 살았던 시절처럼 새로운 부류의 특권층이 득세하는 시대에 예술 또한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예술론이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 것은 그의 사상적 궤적이 민중을 향하고 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톨스토이가 소수에 특화된 예술을 배격하는 보편타당한 감식안을 지니고 있는 사상가로서, 여전히 그 가치가 유효한, 시대의 흐름에 적합한 예술론을 펼쳐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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