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가 예술의 활동 범위가 축소된 것을 유럽 사회의 상류 계급의 무신앙으로 보는 데는 그가 정교회 신자였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생각대로라면 예술은 ‘인류가 애써 도달한 종교적 자각(自覺)에서 흘러나오는 최고의 감정을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이런 활동이 일부 인사에게 쾌락을 주는 것만이 선별되어 예술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것은 보편적인 의미로서의 예술이 소수 특권층에 귀속되어 그 의미가 타락되었다고 보는 견해로 해석해도 좋을 것 같다.
인류 차원으로 고양되어야 할 예술이 곡해(曲解)된 것은 예술의 분열과 ‘존중할 만한 값어치도 없는 것을 중요한 예술로 인정하는 일’이 유럽 사회에 끼친 도덕적 결과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톨스토이는 에둘러 표현하고 있다. 이런 예술이 파멸 수준에 이른 것을 톨스토이는 세 가지 관점으로 해석한다.
첫째, 예술이 그 고유의 무한히 복잡하고 깊은 종교적 내용을 상실한 일
둘째, 예술이 좁은 범위의 사람들만을 염두에 두어 형식미를 읽고 조작해 낸 듯한 불명료한 것이 되어 버린 일
셋째, 예술이 그 순진한 면을 잃어버리고 머리로 꾸며 낸 까다로운 것이 되어버렸다는 점
이런 식으로 예술이 타락한 이유를 톨스토이는 상류 계급의 예술이 ‘종교적인 지각에 의하지 않고 얻어지는 쾌락의 정도에 의해 감정을 평가했기 때문에 그러한 새로운 감정의 원천(原泉)을 잃어버렸다’는 데서 그 원인을 찾는다.
참다운 예술 작품이란 아직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감정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톨스토이가 이런 구절을 표명하며 상류 계급의 예술을 비난한 것은 ‘무릇 쾌락만큼 낡고 진부한 것은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또 종교적 지각이 예술의 본원적 가치에 도달할 수 있는 이유는 종교적 자각이 섰을 때만 사람들에게서 여태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정이 솟아나기 때문이라고 역설(力說)한다.
종교적 자각이란, 세계에 대해서 새로이 태어나는 인간의 태도 표시일 뿐 다른 것이 아니므로, 종교적 자각에서 나오는 감정은 무한히 다채롭다.
그러므로 이런 종교적 자각을 벗어난 유럽 상류 계급의 무신앙은 ‘옛날부터 실컷 음미되고 죄다 표현되어 버렸던’ 쾌락을 답습하는 한계로 그들을 ‘가장 빈약한 예술’로 이끌어 갔다고 톨스토이는 성토하는 것이다. 또 그들의 예술은 종교성을 상실한 것은 물론 그 내용이 더욱 빈곤해지고 예술이 표현하는 감정의 범위 또한 점점 좁혀졌다는 것이 톨스토이의 견해다.
권력 있고 유복하고 생활고(生活苦)를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경험되는 감정의 폭이란 근로 대중 고유의 감정에 비해서 훨씬 좁고 빈약하고 하찮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톨스토이의 생각은 일반적인 생각의 틀을 넘어서 새로운 관점에서 부유한 자를 바라보게 한다. 통상적으로 부를 누리는 사람들의 경험이 대중을 넘어선다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톨스토이가 곤차로프(1812~91)라는 작가에게서 그가 들은 말은 ‘민중의 생활로는 아무것도 쓸 것이 없어졌다’는 얘기였다. 투르게네프(1818~83)가 쓴 《사냥꾼 일기》가 대중의 생활을 표현한 것의 전부라고 여겼을 만큼 곤차로프라는 작가조차 소수 상류 계급의 생활을 다소 이상적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이런 견해를 톨스토이는 에둘러 비판한다.
곤차로프에게도 이 세계는 복잡하고 변화가 풍부하여 끝간 데가 없다고 여겨졌으리라.
하지만 톨스토이는 오히려 근로를 하는 대중의 생활이 더욱 다채롭고, 변화무쌍하다고 주장한다.
또 근로 대중의 생활은 알맹이가 빈약하고 우리 유한계급인의 생활은 흥미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을 실제로 품고 있는 사람은 우리 같은 사람 중에도 매우 많다.
이런 자각은 그가 유한계급임을 인정한 측면에서 나온 주장이라 더욱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 그가 이 장에서 노동자의 생활이 변화무쌍하다는 실례를 든 내용은 거의 열 줄이나 된다. 그러면서 다시금 유한계급의 눈으로 노동자 계급에 대한 몰이해를 질타한다.
이러한 관심이나 종교적 이해라는 것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우리에게는, 타인이 우리를 위해 만들어 준 것을 이용하고 파괴하고 있을 뿐 근로도 아니거니와 창작도 아닌 우리들 생활의 사소한 쾌락이나 하찮은 번민에 비한다면 도리어 단조롭게 보이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노동자 계급의 활동성을 설명해 주는 차원을 넘어서서 유한계급의 비생산적인 측면을 질타하고 있다는 점에서 톨스토이의 날카로운 시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유한계급이 가지고 있는 그런 비뚤어진 시선은 ‘세 개의 아주 보잘것없는 단순한 감정’으로 돌릴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것은 바로 ‘오만과 성욕(性慾)과 삶의 애수(哀愁)’라고 직시한다.
이 세 가지 감정과 거기서 나온 부차적인 부분이 부유 계급 예술의 거의 독점적인 내용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어 ‘상류 계급의 배타적 예술이 민간 예술에서 분리되어 나가던 최초에 예술의 주요한 내용을 이룬 것’은 오만의 감정이었다고 술회한다. 이어 강자를 칭송하는 찬미가가 써지고, 그들의 초상화가 그려졌으며 위용을 보이는 입상(立像)이 들어선 것도 차츰 성욕의 요소가 예술 속에서 스며든 것이라고 진단한다. 이후 들어온 애수(哀愁)의 감정 또한 부유 계급 예술에 대한 실마리를 프랑스의 비평가 두믹의 《청년들》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신진 작가 작품의 특징을 에둘러 표현하기도 한다.
그것은 삶의 권태, 당대에 대한 경멸, 예술의 환영을 통해 증명된 다른 시대에 대한 애석함, 역설적 취미,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싶은 욕구, 단순성을 향한 고상한 열망, 경이에 대한 어린아이와 같은 숭배열, 명상에의 병적인 유혹, 신경의 격동, 그중에서도 육감(肉感)에 대한 거센 유혹이다.
이 구절을 인용하며 톨스토이는 글의 논점을 육욕(肉慾)을 대상으로 한 예술 작품으로 옮겨가 이를 비판한다. 이를테면, 별의별 형태의 성애(性愛)가 고정적으로 묘사된 소설과 시가(詩歌), 모든 소설이 즐겨 다루는 간통이란 소재, 연극에서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여체, 로맨스나 가요조차도 ‘요컨대 색욕(色慾)의 표현’이라고 갈파한다. 이 외에도 프랑스의 화가 그림, 구르몽이라는 작가가 쓴 성애 소설 <디오메드의 말>에 대한 언급, 호평을 받은 몇 권의 책조차도 색정광(色情狂)들의 작품이라고 일갈하며, 당시 유럽이나 예술계는 모두가 이 색광증(色狂症) 환자의 흉내를 내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부유 계급의 무신앙과 이렇게 터무니없이 난잡한 생활의 결과로, 이들 계급의 예술은 그 내용이 빈약해지고 오직 허영과 삶의 애수 그리고 특히 색욕의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 장의 톨스토이의 예술론에서 주목할 대목은 종교적 자각이 단순히 영성의 가치를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서 인간의 무한히 다채로운 다양한 감정이 발현되고, 새롭게 태어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여태껏 도덕과 윤리적으로만 바라보았던 종교의 신앙적 가치를 새로운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신선한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또한 막연히 부유층의 화려한 예술을 동경했던 것이 얼마나 몰이해에 기반한 믿음이었는지 알게 되었던 것 또한 큰 깨달음이었다. 톨스토이의 예술관을 정리해 보면, 예술은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대부분 보통 사람들 속에서 자리하고 있는 것이지 화려한 부를 토대로 이를 과시하는 소수 부유층에게만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신화된 예술이 얼마나 그 범위가 좁혀졌으며, 진정한 예술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이 갈수록 멀어질 수밖에 없는지 안타까움만 찾아들 뿐이다. 톨스토이처럼 당대 유한계급의 삶을 살면서도 자기 스스로 돌아볼 수 있었던 거장의 노력으로 인해 이처럼 시대를 초월한 예술론을 접할 수 있게 된 것은 그야말로 행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유한계급 – 생산적 활동 대신 소유한 재산으로 소비만 하는 계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