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톨스토이는 이 장에서 예술을 ‘인간이 도달한 최고 최선의 감정을 사람들에게 전달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작업’으로 정의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교회의 가르침은 상당 기간 인류에게 신뢰를 심어주지 못했던 것으로 인식한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쾌락만을 주는 예술의 하찮은 작업에 만족’ 해 온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던진다. 톨스토이는 이에 대한 대답을 하기 전에 사람들이 범하기 쉬운 과오를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선언한다. 그는 인종별 대표 민족으로 생각되는 앵글로색슨족, 게르만족, 갈리아 라틴족, 슬라브족을 우수 인종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현대 예술 또한 그런 대표적인 예술로서 지위를 점유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한때 기독교 상류계급으로 불리던 이들의 예술은 예술 전체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거의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기독교 민족의 상류계급이 교회 기독교에 대한 신앙을 잃은 이후로’ 상류계급의 예술은 민중 예술과 지배자 예술로 갈라졌다고 설파한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이런 결론으로 인해 진정한 예술이 인류사에서 일시적으로 사라졌다고 하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주장은 ‘기독교를 신봉하는 유럽 사회의 상류계급’에만 해당되고, 기간 또한 르네상스 및 종교 개혁의 초기부터 최근까지라고 한정한다. 이런 문맥이라면 사실상 진정한 예술은 면면이 이어져 온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다음에 이어진문장은 진정한 예술이 없어진 결과, 그런 예술을 누리던 계급의 타락이 초래되었다고 진술한다. 상류계급의 예술이 진정한 예술이 아니었다는 주장과 배치되는 이 내용은 현대 상류계급의 예술을 비판하는 측면에서 논리적 오류를 범하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이런 문맥의 오류는 다소 긴 만연체의 문장과 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문장으로 바로잡지 못한 이유가 크다.
‘현대 상류계급의 예술이 유일한 전 세계적인 예술이라는 그릇된 확신’ 또한 ‘저희들의 종교야말로 참다운 종교라고 믿는 각 종파 신자의 확신’과 마찬가지로 전혀 옳지 않다고 기술하는 것은 보편적인 예술의 가치가 대중에게 널리 퍼져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진술은 종교의 다양성과 마찬가지로 예술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거장의 해석으로 볼 수 있다. 그런 한 편, ‘우리가 가진 예술이 진정하고 유일한 예술인데 인류의 2/3를 점하는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모든 민족이 이 유일 최고의 예술을 모른 채 살다가 죽어 간다’고 기술하는 내용을 보면, 소수 특권층의 엘리트 예술을 인정하지 않고 보편적인 가치의 예술을 인정하던 톨스토이의 주장과 상반된 내용이라 과연 이 주장이 어떤 관점에서 이루어졌는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도 발생한다.
이 예술을 즐기는 것은 우리 기독교를 신봉하는 사회에서도 전체의 1퍼센트가 될까 말까 하고, 그 나머지 유럽 민족의 99퍼센트는 한 번도 이 예술을 즐긴 적이 없다.
그렇다면 과연 톨스토이가 말하는 이 예술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대다수가 향유하지 못하는 예술을 과연 진정한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독자적인 문화로서 발생하는 예술은 예술로서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소수만이 향유하는 예술이 진정한 예술이 아니라고 선언하고서는 오히려 보편화된 대중화된 예술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이런 모순적인 태도는 과연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여기서 톨스토이가 말하는 진정한 예술에 대한 정의는 일상에서 보이는 보편적인 예술의 범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소위 일반적인 관점에서 말하는 예술의 범위를 지칭한 듯 여겨진다. 이를테면, 음악가, 무용가, 배우 등 전문화되고 세련된 직업군을 필요로 하는 예술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희생자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톨스토이의 견해다.
현대의 세련된 예술은 대중을 노예로 부리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니, 그것이 노예 제도가 아니고서는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이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결국 톨스토이의 관점에서 예술은 특정인의 전유물이라고 인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로 현대 예술의 옹호론자들처럼 ‘상류계급 사람들처럼 교양을 갖추면’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전처럼 부유한 사람들이 누리던 행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일갈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무릇 우리 예술이란 것은 돈이 들기 때문에 노동 대중의 대다수가 엄두도 낼 수 없겠지만, 또 그 내용이 여러 사람들이 처한 근로 생활의 실태와는 동떨어진 감정을 전한다는 점에서도 인연이 없는 것이다.
부유층의 사람에게 쾌락으로 느껴지는 예술이 일반 사람들에게 그런 쾌락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처럼 예술이 대중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를 위한 쾌락의 도구로 기능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려와 성의를 가진 사람들은 상류계급의 예술이 곧 전체 대중의 예술일 수 없다는 데 아무런 의심도 갖지 않을 것이다.
이는 예술의 속성을 간파한 것으로 예술이 ‘만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정신적 복지(福祉)’가 아니라 특수계층에 한정된 고급 놀음임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다음 구절은 톨스토이 그런 예술관을 명징하게 드러내준다.
고상한 미, 즉 최고의 쾌락에 참여하여 이를 향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로맨틱한 사람들이 말하는 선택된 아름다운 영혼이나 니체의 후계자들이 말하는 초인(超人) 뿐이요, 쾌락을 맛볼 능력이 없는 여타의 천한 민중은 이 상류 인사의 고상한 쾌락에 봉사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한다.
이런 톨스토이의 예술론은 예술이 여전히 상류계급만을 위한 전유물로 인식하게 한다. 우리가 현대에 일상적으로 예술이라고 느끼는 감성은 톨스토이 당대에는 이렇듯 예술을 점유하는 소수의 전유물로 자리하였다. 그런 전유물을 위해 다수의 민중은 그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부정할 순 없었을 것이다. 다만 현시점에서 보면, 톨스토이가 주장했던 것처럼 일반인들에게 예술은 이전보다도 많이 일상적이고 대중화된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재정적 여건 등으로 인해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계층은 자본주의 사회라는 제약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예술이 종교처럼 대중에게 보편적인 가치로 다가설 수 없는 것은 이런 한계 때문이다. 고로 톨스토이의 예술론은 과연 예술이 다수의 대중에게 복무할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의 문제였다. 예술이 아무리 고상하고 대단한 가치를 지녔더라도 이를 향유할 수 있는 부류가 소수에 한정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예술은 보편적으로 유용하다는 가치를 얻을 수 없게 된다. 이는 예술의 보편적인 가치라고 볼 수 있는 인류의 복지를 위한 차원에서는 기능할 수 없는 그 존재론적 한계성을 지적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인류의 보편적인 예술의 등장은 아직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한 추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