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는 이 장에서 예술이 인정 받든 지, 아니면 배척되던 예술이 현대에 와서 어떤 만족만 주면 좋은 것으로 여겨지게 된 배경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에 대한 원인으로, ‘예술이 전달하는 감정의 평가는 인간이 인생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렸다고 기술한다. 이런 해석은 선과 악에서 주로 결정되는데 그것을 주관하는 것이 바로 종교라는 것이다.
제6장에서는 이렇듯 종교와 예술의 관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논점을 확대해 나간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톨스토이가 종교의 생성 과정까지 상세히 설명한다는 사실이다. 종교의 생성 과정은 도그마와 같아서 보편적인 사유의 관점에서 이런 범주에 접근한다는 것은 다소 생경한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종교의 생성과 형성 과정이 인류의 숙명론적 관점이 아닌 인간 삶의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주장은 충격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들 선구자 중에는 언제나 이 인생의 의미를 더욱 뚜렷하고 알기 쉽고 힘차게, 말과 실천으로 나타낸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이 표명한 인생의 의미와 보통 사람들 주변에 형성되는 미신 · 전통 · 의식이 함께 어울려서 종교(宗敎)가 만들어진다.
이런 종교의 생성관은 필자가 기존에 알고 있던 신비와 예언적 요소를 배제하고, 인류사의 발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신선한 사유의 관점으로 접근할 여지도 있다. 이어지는 발언은 종교가 필연적인 의지로 탄생되었다고 보기보다는 영향력 있는 소수로 인해 좌지우지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다.
종교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 뛰어난 선구자들에게 알려진 최고의 인생관이며, 그 사회의 나머지 사람들은 싫든 좋든 반드시 여기에 접근해 가는 법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런 종교의 영향으로 예술의 가치가 자주 그 의미가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가령, 신의 계율에 대한 사랑을 감정으로 전달하는 것이 특정 종교의 가르침이었다면 그와 관련된 성시(聖詩), 성가(聖歌) 등이 좋은 예술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종교적 자각이 예술에 의해서 전달되는 감정의 가치를 판단한다’는 것이 핵심요소로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톨스토이가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다루고자 하는 종교는 기독교지만 그가 비판하고자 하는 종교는 초기 기독교가 아니라 ‘이교에 가까운 기독교가 모든 민중을 기독교로 개종시킨 이후’에 나타났다고 언급한 기독교라고 할 수 있다. 확실한 해석일지는 모르겠지만 구교와 신교를 이렇게 표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충격적인 것은 톨스토이가 예술의 가치를 논하는 과정에서 종교의 상층부에 자리했던 이들의 종교관을 여지없이 까발린다는 데 있다. 앞서 톨스토이는 종교란 소수의 입김으로 인해 생성되고, 대다수의 민중은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한계성을 인지하고 설파했다. 이런 과정에서 소수 부유한 계급의 사람들은 가톨릭에서 제시된 교리를 부정하게 되었고, 십자군 원정, 교황권의 남용 등을 통해 고대 현자들의 지혜를 재조명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던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이런 소수 특권층들의 인식은 기존 교회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단계에 이르렀지만 민중들은 여전히 교회의 주장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민중들의 행보는 특권층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더욱 공고화되었다. 그렇기에 이런 소수 계층들은 기독교의 진정한 가르침을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왜냐하면 그런 가르침을 수용하는 것이 그들이 가진 부와 지위를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했기 때문이다. 소위 없는 자들에게는 종교적 가르침을 따르게 하여 가난하고 청빈한 삶이 마치 신의 뜻이라고 인도한 꼴이 되었고, 자기들은 그런 가르침을 수용하는 대신 세속적인 권위와 부를 누렸던 것이다. 결국 종교의 입맛에 맞게 그 가치가 평가될 수밖에 없었던 예술의 운명은 소수 특권층으로 인해 다시금 쾌락적인 요소를 추종하는 방향으로 변해갔다. 이런 이들의 행태와는 달리 다수의 민중은 여전히 종교가 지향하는 예술의 형태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음 구절의 내용은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기만성이 폭로된 가톨릭 종교는 이미 믿을 수 없게 되었고 그렇다고 해서 자기네들의 생활을 부정하는 진정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취할 수도 없었으므로, 이들 부와 권력을 지닌 사람들은 인생의 종교적인 이해를 온통 상실하고, 어쩔 수 없이 인생의 의의는 개인의 쾌락에 있다고 하는 이교적인 세계관으로 향하게 되었다.
톨스토이가 이토록 가톨릭 종교를 비판하고 있는 것은 그가 러시아 정교회의 신자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기존의 기독교를 비판했던 톨스토이는 결국 러시아 정교회에서도 출교 당했을 만큼 종교적인 관점에서는 독자적인 노선을 견지했다. 이런 톨스토이의 행보는 이른바 상류 계급의 행동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다소 편향적인 종교관으로 인해 톨스토이의 주장을 전적으로 믿기에는 우려할 부분도 없지 않다. 그렇더라도 거장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당시의 종교관을 모두 부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특히 이런 상류 계급이 기독교의 도덕적, 사회적 가르침을 인정할 수 없었던 이유로, ‘그러한 가르침이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파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하는 대목에서는 마치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상류 계급에는 이른바 ‘과학과 예술의 부흥’, 모든 종교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실상 그 불필요함을 인정하는 일이 이루어졌다.
민중에게는 그리스도의 교리를 설파하면서 정작 자기들은 그들의 세속적인 지위와 위치를 지키고자 종교관을 포기했다는 것은 결국 종교를 통해 기득권을 누리고, 대다수의 민중에게는 희생을 강요했다는 논리밖에 성립하지 않는다. 해서 한때는 종교의 입맛에 맞춰 평가를 받았던 예술이 개인적 쾌락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던 현실을 톨스토이는 예술의 성장이 아닌 과거로의 회귀, 즉 퇴화로 결론짓는다.
이제 종교적 세계관을 가지지 않은 그들에게는 좋은 예술과 나쁜 예술을 평가하는 척도로서 개인적 쾌락밖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래서 선(善)의 척도로서의 쾌락, 즉 미를 인정한 유럽 사회의 상류 계급 사람들은 예술을 자기 나름으로 해석하여, 이미 플라톤이 비난한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잡스러운 예술관으로 퇴화해 버렸다.
이번 장에서는 이처럼 종교와 예술이 맺었던 애증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계층적 이익에 맞춰 변질되고, 그것이 예술의 진정한 의미를 어떻게 퇴색시켰는지 거장의 시선을 통해 명징하게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