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는 이 장에서 예술을 정의하되 미의 개념을 빼놓은 것에 대해 논한다. 언뜻 예술을 정의하는 데 있어 미의 개념을 빼놓는다는 것이 약간은 이해가 가지 않지만 이에 관해 논했던 학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견해를 참고하는 것도 도움이 되기는 할 것이다.
저자는 실러 · 다윈 · 스펜서가 주장했던 이유를 들어 이를 성적 감정과 유희 충동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랜트 앨런의 말을 인용하면, 신경 에너지의 흥분이 따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를 생리학적 · 진화론적 정의로 규정한다. 또한 베롱이 주장하는 선 · 색 · 동작 · 음향 · 언어와 같은 것을 경험적 정의로 분류하기도 한다. 최근 이론이라고 소개한 설리라는 학자의 견해를 인용하며, 형이상학적인 정의에 비한다면 우수하지만 정확한 것은 못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결국 톨스토이가 형이상학적인 정의나 미의 개념을 제외한 학자들의 정의가 부정확하다고 하는 보는 것은 예술의 목적이 쾌락에 있지 않고, 인류 생활에 있어 예술의 사명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톨스토이에게 예술은 ‘인간 상호 간의 교류 수단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이런 인간 상호 간의 교류는 비단 당대의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과거 · 현재 · 미래를 총망라한 모든 사람들 사이의 교류를 포괄하는 것이다. 고로 톨스토이에게 있어 예술은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진실로 예술 활동의 기초는, 인간이 남의 마음에 감염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정의가 무작정 적용된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예술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일정한 외면적인 부호로 이를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 때문이다. 이는 예술의 형식미를 강조한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사례를 보면, 톨스토이는 다양한 주장을 병치시켜 설명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사실상 예술의 범주에 속하는 것은 인간의 감정을 전이시키는 거의 모든 활동으로 정의내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를 토대로 톨스토이가 내린 예술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즉 예술이란 어떤 사람이 자기가 경험한 느낌을 의식적으로 일정한 외면적인 부호로써 타인에게 전하고, 타인은 이 느낌에 감염되어 이를 경험한다는 것으로써 성립되는 인간의 작업이다.
이런 정의를 통해 톨스토이는 예술이 신비적인 관념, 유희, 감정의 발로, 즐거운 대상을 만들어내는 일, 쾌락은 더더구나 아니라고 강조한다. 결국 톨스토이에게 예술은 ‘인류의 생활과 행복에의 발걸음에 없어서는 안 될 인간 상호 간의 교류 수단이요, 모든 사람을 동일한 감정으로 통일하는 수단’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또한 협의의 의미로 사용되는 예술의 범주에 대해서도 일침을 놓는다. 예술을 광의의 의미를 해석해 보면, 사실상 ‘우리의 모든 생활 속’ 전부가 예술의 범주에 놓일 수 있음을 설파하는 것이다. 이런 협의의 예술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톨스토이는 고대인들, 이를테면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에게서 찾는다. 이들과 같은 견해를 피력한 부류로는 유대의 예언자나 원시 기독교도들을 꼽기도 한다. 또한 이와 대척점에 있는 이들도 거론이 된다. 플라톤을 비롯하여 원시 기독교도, 마호메트 교도, 불교도들이 그런 부류들이다. 이들은 현대의 견해처럼 쾌락을 주기만 하면 모두 예술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예술은 추방해 버려야 한다는 예술추방론을 펼치기도 한다. 톨스토이는 이런 추방론을 펼치는 사람들에게 ‘그것 없이는 인류가 생존하지 못하는 불가결한 교류 수단의 하나’이기에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고 일갈한다. 그리고 이런 예술의 부정론자들보다 예술이 주는 쾌락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여 이를 보호하는 이들이 더 해롭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톨스토이의 예술론은 대중의 관점에서 쾌락을 지향점으로 삼고 있는 예술에 대한 관념들을 뒤엎고, 인류가 생존에 필요한 필수 요소로서 예술의 가치를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효용성을 더 부각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