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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by 정작가


톨스토이의 <예술이란 무엇인가>에서 제3장은 총론의 성격을 띠고 있다. 미학의 창시자인 바움가르텐부터 미와 관련된 정의를 차례로 짚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인 톨스토이가 바라보는 바움가르텐의 미학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미의 발현에 관한 바움가르텐의 견해는 오직 자연 속에서만 미를 완전하게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바움가르텐의 후계자로 명명한 사람들 이를테면, 마이어, 에르셴부르크, 에베르하르트와 같은 이들은 이름만 언급했을 뿐, 그에 대한 이론적 해석은 생략했다. 바움가르텐이 미학의 창시자임에도 그의 후계를 다루지 않은 것은 예술의 미가 미보다는 선에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런 학자들로는 줄체르, 멘델스존, 모리츠 등이 있다. 이들의 미에 대한 견해는 기존의 바움가르텐이 분류했던 진‧선‧미라는 형식의 분류를 무시하고 미를 선과 진에 결합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이 또한 후세의 미학자들에게는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와 대립된 빙켈만의 예술론은 조형미에 기초를 둔다. 빙켈만의 미학은 형식의 미, 형상으로 표현되는 관념미, 이상의 두 조건이 갖춰졌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표정미에 대해 다룬다.

이 표정미(表情美)는 고대 예술에 실현되었던 예술의 최고 목적이다. 따라서 현대 예술은 고대 예술을 모방하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한다.


이런 견해를 가진 이들은 빙켈만 이외에도 레싱, 헤르더, 괴테 등과 더불어 칸트 이전에 등장한 미학자들이 있다고 톨스토이는 기술한다.

또 다른 미학자 섀프츠베리의 이론은 미와 선을 별개의 것으로 구분한다. 미를 선과 융합시켜 분리시킬 수 없는 것으로 규정짓고 있다는 점도 색다른 접근이다.


허치슨의 저서 《미의식과 도덕 관념의 기원》에서는 ‘미란 언제나 반드시 선과 일치한다고 할 수 없’다는 견해를 인용하기도 한다. 홈에 의하면 미란 유쾌한 것이고, 미를 규정짓는 것은 취미뿐이라고 단언한다. 버크의 《숭고와 미의 관념의 기원》에서 주장한 미학론에서는 ‘예술의 목적인 숭고와 미는 자기 보존감과 사회공존감을 조장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규정한다.


톨스토이는 이처럼 18세기 영국에서 대두되었던 예술과 미에 대한 정의를 정리하면서 프랑스에서 나왔던 예술론을 이를 연구한 학자들의 관점에서도 접근한다. 디드로, 달랑베르, 페르 앙드레, 바토, 볼테르와 같은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의 예술론에 대해서는 예술에 대한 대표적인 정의를 소개하는 선에서 끝을 맺는다. 이탈리아 미학자 파가노의 견해를 보면, 미와 선은 융합되어 있고, 미는 가시적인 선, 선은 내재적 미라고 못 박고 있다. 이탈리아의 또 다른 미학자인 무라토리, 스팔레티의 예술에 관한 정의도 간단히 언급된다. 네덜란드 학자 중에서 헴스테르휴이스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미에 의한 쾌락은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지각을 주므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인격이다.


칸트의 미학론은 빙켈만 이후에 나타난 전혀 새로운 미학론으로 그 가치를 규정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에 대한 부분도 언급된다. 또한 칸트의 후계자 중 하나인 실러의 미에 대한 정의는 쾌락으로서 미학을 보는 관점이 어떤지 명징하게 드러내 준다.


미의 원천은 실제적 이해와 무관한 쾌락이라는 것이다.


칸트의 후계자 중에서 훔볼트, 피히테, 셸링, 헤겔은 미학사에 그의 계보를 잇는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이 중에서 피히테의 미학관은 ‘예술가의 아름다운 마음속에 존재’하는 미의 특징을 역설(力說) 한다는 측면에서 다소 형이상학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피히테 이후로 언급한 미학자는 프리드리히 슐레겔과 아담 뮐러를 들 수 있다. 슐레겔 미학관의 조화의 미, 아담 뮐러는 우주적 조화의 재현을 그 속에 담고 있다. 톨스토이는 이후에 등장한 셸링을 미학의 발전사에서 커다란 영향을 준 사람으로 규정한다. 그의 미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미란 유한 속에 깃들인 무한의 표상이다.


이런 미학관은 그의 후계자인 졸거로 이어져 ‘예술은 창조와 유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라는 창조적 예술론으로 확장된다. 셸링의 후계자 중 한 사람인 크라우제는 앞선 졸거의 창조적 예술론과 대비되는 ‘생활의 예술론’을 주창한다. 이후에 예술론을 발전시킨 사람은 헤겔이다. 헤겔은 명백한 정의보다는 다소 애매하고 신비한 경향을 띤 예술론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의식적인 지지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예술은 이러한 관념의 가상을 실현하는 것이며, 종교와 철학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가장 깊은 문제와 정신의 가장 높은 진리를 의식에 올려놓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런 관념적 예술론은 워낙 철학적이고 사변적이어서 후대에는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헤겔의 후계자로는 바이제, 아르놀트 루게, 로젠크란츠, 테오도르 피셔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예술론은 헤겔의 학풍을 따르는 독일의 미학론으로서 스승의 경향처럼 다소 관념적이고 난해한 방향으로 흐른다. 이런 경향에 반기를 들었던 이들로는 헤르바르트와 쇼펜하우어를 들 수 있다. 이들은 관념적인 미학론과는 대비된 선과 빛깔같은 지표에서 미의 근원을 탐색했다. 쇼펜하우어는 관념의 객관화를 통해 미학이 피상적인 이론의 고찰에 머무르는 것을 경계했다. 이후에 등장한 독일의 학자들은 하르트만, 키르흐만, 슈나제, 헬름홀츠, 베르크만, 융만 등을 들 수 있다. 하르트만의 미학론은 ‘예술가가 창조해 내는 외견’에 중점을 두었다. 슈나제는 ‘자아 활동 속의 미’로서 이를 해석했다. 키르흐만은 ‘실험적 미학’을, 헬름홀츠는 ‘음악의 미’를 논한 미학자로 평가받는다. 베르크만은 ‘미의 주관적 인식’에 대해, 융만은 ‘관조에 의한 쾌감’을 설파했다.


이어지는 근대 프랑스, 영국, 그 밖의 여러 나라의 대표적인 미학론자들로 톨스토이는 쿠쟁, 주프루아, 피크테, 레베크 등을 든다. 쿠쟁의 미학 이론은 윤리적 기반과 통일 속의 다양성에 천착하고 있으며, 주프루아는 ‘자연의 형상’으로서 미를 설명한다. 피크테는 ‘감성적 형상 속의 미’를 발견하고, 레베크는 자연 속에 가려진 에너지에서 미의 가치를 찾는다. 톨스토이는 또 프랑스의 형이상학자 라베송-몰리엥을 언급하며 ‘미의 본질에 대해 분명치 않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고 주장한다. 톨스토이는 이런 형이상학적인 개념의 본질에 대해 해석 자체를 거부한다. 원어를 그대로 표기한 것은 해석으로 인해 개념이 와전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보인다.


톨스토이가 당대 프랑스에서 예술과 미의 개념에 관해 영향을 주었다고 판단했던 사람으로는 텐, 귀요, 셰르뷜리에, 코스테, 베롱 등이다. 텐은 미에 대해 ‘관념의 본질적 특색보다 한층 더 완벽한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고 정의하고 있고, 귀요는 미에 대해 ‘사물의 꽃’으로 존재한다는 견해를 밝힌다. 셰르뷜리에는 ‘우리에게 특징적, 조화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라고 미를 정의한다. 코스테는 미의 관념은 ‘인생의 모든 표현을 통일하는 질서를 내포한다’고 보았다. 톨스토이가 비교적 당대의 최신 경향을 다룬 미에 대한 개념 정의는 마리오 필로, 피에랑 제바에르, 사르 펠라당의 예술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의 미에 대한 견해는 ‘생리적 감각의 소산’, ‘관계의 지배’, ‘신의 예속’ 등의 표현으로 함축된다.

톨스토이가 당대의 예술과 미에 대한 미학자들을 연구하면서 비교적 합리적이고 논지가 명료한 것으로 평가한 사람은 베롱이다. 베롱은 ‘예술은 선, 형, 색의 결합 또는 어떠한 일정한 리듬에 따르는 운동, 음향, 언어의 연속으로 외부에 나타나는 감정의 표현이다’라고 밝혔다.


톨스토이가 19세기 초반 영국의 우수한 미학자로 든 이들은 찰스 다윈, 스펜서, 토드헌터, 멀리, 앨런, 커, 나이트 등이다. 찰스 다윈은 ‘미는 여러 가지 관념을 내포한다’고 했으며, 스펜서는 미를 ‘유희로부터 유래한다’고 정의한다. 토드헌터는 ‘미는 모순의 조화다’라고 피력했으며, 몰리는 ‘미가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고 보았다. 그랜트 앨런은 ‘미는 생리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 정의했고, 커는 예술의 통일성에 대해 설파했다. 나이트는 미를 ‘자연 전반에 공통되는 것을 자기 마음속으로 인식하는 것이다’라고 보았다. 설리는 예술이 ‘지속적, 이동적 대상을 만들어낸다’고 규정했다.


이처럼 톨스토이가 정리한 예술과 미에 대한 견해는 매우 포괄적이고 다양한 것이어서 이를 모두 읽고 해석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임을 알게 한다. 톨스토이라는 거장의 예술론이 쉽게 읽히지 않는 이유는 이렇듯 방대한 예술과 미학의 역사가 결코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님을 실감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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