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200년 전의 시간을 거슬러, 우리에게 위대한 사상가로 알려진 톨스토이의 예술론을 톺아보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설렘으로 자리할 수 있다. 과연 이 위대한 지성은 어떤 방식으로 예술을 보고 평했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다. 하지만 첫 장을 읽고 나서, 안면에 미소를 띨 수 있었던 것은 다소 생경하고 현학적인 어휘로 혹시 기죽지 않을까 걱정했던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의 개념적인 이론은 이해하기도 쉽지 않고 몇 번을 읽어봐야 겨우 이해되는 내용들이 많지만 톨스토이의 글은 그리 어렵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예술의 본질을 파헤치는 시선은 날카로웠지만 이를 평가하는 방식은 독자에게 편안함을 안겨 줄 만큼 평이했다. 우선 그는 예술이 범람하는 시대의 자화상을 담담한 어조로 진술한다.
어느 것이라도 좋다. 요즘 신문을 보면 어떤 것에서든 연극난이나 음악난이 눈에 띈다. 거의 호마다 무슨 전람회나 그림에 관한 기사가 실리고, 또 호마다 예술에 관한 신간이나 시·소설을 소개하고 있다.
제1장을 시작하는 첫 구절은 이렇듯 담담하다. 톨스토이가 환생해 유튜브와 쇼츠, 각종 엔터테인먼트 산업, 인공지능이 판치는 세상을 보았더라면 아마도 기절초풍했을 것이다. 신문에 실린 연극과 연주회, 전시회나 문학 관련 동향에도 관심을 가졌던 거장이었더라면 더욱더 흥분한 어조로 세상에 대한 느낌을 피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피력한 예술 분야를 보면, 당시 사회에서 통용되던 전 분야의 예술을 망라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런 언급 속의 내재된 분위기를 살펴보면, 산업화 시대가 태동한 이후 활기차게 돌아가는 세상의 흐름을 대략적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톨스토이가 바라보았던 예술은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미학적 특성을 고찰하는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예술론이라고 하기보다는 당시 사회적 현실을 직시하고 비판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 것을 알 수 있다.
전 국민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는데 필요한 액수의 불과 1퍼센트 만을 국민 교육에 배당하고 있는 러시아 정부도, 미술학교나 음악학교 또는 극장에 대해서는 수백만 루블의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이런 통찰은 당장 중요한 교육에도 국가 예산을 제대로 집행하지 않는데 귀족들의 사치스럽고 고급스러운 취미를 위해서는 국가 재정을 펑펑 쓴다는 비판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톨스토이가 살았던 시절에는 농노제도가 붕괴되어 가는 시기이긴 했지만 농민들은 토지를 얻는 대신 정부에 상환금을 내야 했고, 여전히 지주의 지배구조는 변하지 않았던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 예술과 관련된 기관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고 있는 현실이 톨스토이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에 언급한 구절은 그런 그의 태도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수십만의 노동자가 예술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가혹한 노동 속에서 일생을 보낸다. 아마 모든 인간 활동 가운데 전쟁을 제외하고는 이만한 노력이 기울여지는 것도 없을 것이다.
이는 예술이란 미명하에 소수의 고급적인 차원의 취미 생활을 위해 다수가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현실을 맹렬하게 비판한 톨스토이의 의식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예술과 관련된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전쟁 수행 행위에 빗대어 표현한 부분은 현실적 비극성을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예술 장르에 대한 비판 또한 예술의 본질적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수십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어려서부터 전 생애를 다 바쳐 재빨리 발을 옮기는 것을 배우든지 – 무용가
건반이나 현을 다루는 법을 배워 그 음률을 익히든지 – 음악가
물감이나 그 밖의 도구를 이용하여 눈에 띄는 것을 닥치는 대로 묘사하는 법을 습득하든지 – 화가
혹은 여러 어구를 여러 가지 풍으로 옮겨 그 하나하나에 운을 맞출 수 있도록 공부하기도 - 시인
그런 비판은 예술적 장르에 봉직하는 사람들을 비꼬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술 종사자들이 현실감각을 잃은 편벽한 이들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는 다음 표현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들은 다만 발이나 혀나 손가락을 놀리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전문가로 만족하는 정도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는 통합적인 인간의 관점에서 극히 일부분에 특화되어 복합적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예술인들의 한계를 지적하는 뉘앙스를 띄기도 한다.
톨스토이가 현장에서 느꼈던 예술 종사자들의 근무배경을 묘사하는 대목이 있다. 여기서는 열악한 노동자들의 현실과 이와 반대급부로 소수만 추앙받고 혜택을 누리는 예술계에서의 부익부 빈익빈의 논리가 통용되는 상황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가 신작 오페라를 연습하는 현장에서 목도한 것은 오케스트라 악장의 단원들에 대한 횡포와 권력 집중화로 인한 폐해였다. 하역장의 노동자나 건초 더미를 쌓는 과정에서 지주에게 야단을 맞는 경우는 안전에 대해 우려로서 그런 감정적 상처를 용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상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 소위 예술을 한답시고 악사나 가수들에게 감정적인 상처를 주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톨스토이는 에둘러 말한다. 그의 비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반라의 여자들이 뇌쇄시킬 듯한 동작을 하며 여러 가지 형태로 육감적인 기교를 보이는 발레에 이르면, 그것은 바로 타락한 구경거리다.
발레를 이토록 강도 높게 비난한 것은 이를 준비하는 과정이 비윤리적이고 인간의 가치를 훼손시키는 악의적인 탄생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런 불쾌하고 어리석은 짓은 선량하고 쾌활하며 천진한 기분으로 준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의와 노기 그리고 짐승 같은 잔인성으로 준비되고 있는 것이다.
예술을 바라보는 톨스토이의 시선은 예리하고 현실 비판적이며, 통찰적인 측면이 강하다.
예술이란 미명하에 수백만 인간의 노력과 생명이 희생될 뿐만 아니라 인간 상호 간의 애정까지도 희생되는데도 불구하고, 예술 그 자체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점점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것이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예술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거장의 노기는 보편적으로 칭해지는 예술이란 개념의 모호성과 대중적 인식 미흡 등으로 더욱 그 가치를 재단하기 어려운 예술의 존재론적 가치에 대한 의미를 정조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같은 장르의 예술 상호 간에도 파를 나누어 대립하고 반목질시하는 세태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과연 무엇을 위해 예술은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예술에 대한 비판적 결론을 내린다.
예술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생명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 상호 간의 애정까지 파괴하면서도, 그 본질이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다.
이런 거장의 인식은 예술의 존재 자체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 못하고, 도리어 인간 삶을 황폐화하는 원흉으로 자리 잡은 예술의 존재론적 가치에 의문을 품는 것이다. 또한 그런 예술이 정체성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는 한계에 직면할 때, 과연 훌륭하고 유익한 속성을 지닌 예술이라는 것이 현실에서 존재하고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은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