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 2차 - 새로운 시작은 그래도 설렌다.

난임 일기

by 라즈베리

기존에 다니던 병원에 들러 "전원서류"를 뗐다. 전원 할 마음은 없지만 이전 선생님 (이제 자주 등장할 테니 A선생님이라고 적어야겠다.) 이 개업한 새로운 병원에 가려면 나의 이력을 들고 가야 할 것 같아서 서류를 뗐다.


시험관 카페에 보면 병원을 옮기고 싶은데 눈치가 보여서 전원 서류 떼기가 좀 그래요. 같은 글이 종종 올라온다. 하지만 진짜 전원 할 사람들,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은 그런 눈치조차 보이지 않는 법이다.


넓디넓은 서울 그렇게 돌아다녀도 또 새로 가는 지역이 있기 마련이다. 처음이지만 처음이 아닌 것처럼 어색한 발걸음으로 빌딩 숲 사이를 지나서 오픈한 지 한 달 남짓 된 새 병원을 찾아갔다. 새 건물 냄새가 난다. 갓칠한 페인트 냄새일까? 모든 게 새것인 느낌이 좋다. 모든 것이 시스템화되어있고 병원 답지 않게 우아한 클래식이 흐르는 대형 난임 센터를 다니다가 이렇게 소규모의 병원에 오니 모든 것이 낯설었다. 대형 난임센터에서 A선생님을 만나 뵈려면 대기 환자가 기본 10명은 넘었는데 이곳에서는 2번째에 내 이름이 올라가 있다.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내 이름이 불렸다.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반가운 A 원장님이 앉아계셨다.


"어서 오시고~~"


늘 듣던 그 인사를 들으니 긴장이 확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내가 믿고 의지하던 선생님이 계신 곳!


"안녕하세요. 이전에 계시던 곳에서 진료를 받다가 원장님 개원하셨단 소식을 듣고 찾아왔어요. 원장님 안 계신 동안에 냉동배아를 해동해서 PGT-A 통과 배아를 1개 이식했는데 두줄 조차 보지 못했어요."


"우리가 배아를 쓸 때 상태가 가장 좋은 배아부터 꺼내서 써요. 그래도 PGT-A를 통과했다는 건 좋은 소식이에요. 자 이제 그럼 남은 배아를 모두 썼으니 새롭게 채취를 하고 PGT-A를 진행한 후 냉동을 합시다. 그리고 소파술을 했던 기록이 있으니 채취 후에 자궁경을 하고 이식합시다."


역시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 난 선생님의 이런 시원시원한 진료 방식이 너무 좋았다. 다음 차수에 대한 계획을 듣고 나니 곧 임신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들었다. 다만 문제는 이곳에 배아 생성 허가가 아직 나지 않아서 당분간 시험관 아기 시술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시간이 별로 없는 나는 일단 나중에 새 병원으로 배아 이관을 하는 쪽으로 생각을 하고 일단은 기존 병원에서 다시 새로운 차수를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집에 돌아와서 또 맥주를 깠다. 골뱅이 소면과 함께 마시는 맥주는 꿀맛이었다. 주사를 맞지 않는 기간 이렇게라도 일탈을 하지 않으면 멘털을 지킬 수가 없다. 한 캔 두 캔 먹고 나서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생리가 시작된 것을 알게 되었다. 식탁 위의 빈 맥주캔을 보며 씁쓸한 미소가 나왔다. 재빨리 식탁을 정리하고 물을 한 컵 들이켰다. 알코올아 얼른 빠져라!!


어제는 전원서류를 떼러 방문했지만 오늘은 생리가 시작되어 다시 기존의 병원을 찾았다. 오늘은 당일접수라는 시스템으로 병원을 이용해야 한다. 당일접수는 예측하지 못한 일로 예약 없이 병원을 방문해서 접수하는 것을 말한다. 예약 환자들이 진료를 받고 나서 내가 진료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운이 나쁘게 담당 선생님이 그날 진료 예약이 많거나 수술이 잡혀 있으면 다른 선생님에게 진료를 봐야 한다. 얼마나 기다릴지, 누구에게 진료를 볼지도 모른 상태에서 병원을 가야 하니 스트레스가 가득한 날이다. 다행히 나는 담당 선생님께 진료를 볼 수 있었고 오랜 기다림 끝에 진료실로 들어갔다.


B선생님은 공감과 위로를 잘해 주시기로 유명하다. 대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진료를 봐주시려 노력하고 설명도 자세히 해주신다. 역시나 나의 실패에 대해 공감하고 위로해 주셨다. 그리고 오늘부터 새롭게 채취를 진행하기로 했다.


지난번 신선 1차 채취에서는 고날에프라는 주사를 맞았는데 신선 2차에 해당하는 이번에는 폴리트롭이라는 주사를 맞기로 했다. 폴리트롭은 주사 용량마다 포장지 색깔이 다른데 내가 맞는 폴리트롭 225는 싱그러운 연두색 상자에 담겨있다. 기분이 좋은 날에는 "가뜩이나 주사 맞기 우울한데 포장지라도 예뻐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기분이 그저 그런 날에는 "뭐 하러 이렇게 포장지를 이쁘게 디자인했을까? 그냥 흰 상자에 넣고 주사 값이라도 깎아주지."라는 생각도 든다.


4일 동안 열심히 주사를 맞고 병원을 다시 찾았다. 난포가 1cm 안팎으로 자라고 있다고 한다. 주사 용량을 신선 1차 때보다 올렸으나 개수가 그때랑 비슷하게 채취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B선생님은 PGT-A를 보낼 것이기 때문에 개수가 좀 더 많았으면 좋겠다며 가니레버와 IVF-M이라는 주사를 추가해주셨다. 새롭게 추가된 주사 중 IVF-M이라는 주사는 꽤나 복잡한 스텝을 거쳐야 했다.


1. 주사기를 식염수 병에 넣어 식염수를 주사기에 옮겨 담는다.

2. 그 주사기를 가루약이 든 병에 꽂아서 주사기에 든 식염수를 가루약 병에 넣는다.

3. 주사기가 꽂힌 병을 손바닥에 놓고 굴리며 식염수와 가루가 잘 섞이도록 굴린다.

4. 가루가 다 녹으면 병을 거꾸로 들어 꽂힌 주사기에 다시 용액을 담는다.

5. 주사기를 병에서 빼서 얇은 바늘로 교체한다.

6. 주사기의 공기를 빼고 배에 맞는다.


하루에 맞는 세 가지 주사 중에 제일 아프다. 주사기가 들어갔다 나온 배가 뻐근하다. 주사기 세대를 놓고 늘 고민한다. 아픈 거부터 맞을까? 아니면 쉬운 거부터 빠르게 맞고 아픈걸 제일 나중에 놓아야 할까?


그리고 다시 4일 뒤 (주사 맞기 시작한 지 8일 뒤) 병원을 찾았다. 난포는 1.7cm-1.9cm로 잘 자라주었다. 이틀 뒤로 채취가 잡혔다. 어제부터 배란 점액이 많이 보였서 걱정이 컸다. B선생님은 난포가 잘 자라고 있다는 증거이고 절대로 조기 배란이 될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다독여주셨다. 오늘은 병원에서 기존에 맞던 주사 3대 ( 폴리트롭 225, 가니레버, IVF-M)을 맞고 왔고 저녁에 병원에서 알려준 시간에 맞춰서 주사 3대(데카펩틸 2대, 오비드렐 1대)를 맞아야 한다. 혹시나 잊을까 봐 알람을 3개나 맞추고 기다렸다. 채취를 위해서 맞는 주사들은 절대 공기를 빼지 말고 그대로 다 맞아야 하며 시간도 철저히 지켜야 한다. 너무 아픈 주사라 아이스팩도 미리 준비하고 포장지도 미리 까놓고 시계의 움직임만 바라보며 기다렸다. 알람이 울리고 아이스팩을 배에 올려 살을 차갑게 만들어주고 있는 힘 껏 뱃살을 꼬집은 채 주사를 놓았다. 얼얼하고 아프고 눈물이 핑 돌았다. 이제 나의 준비는 다 끝났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채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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