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속의 삶, 삶 속의 죽음

천년초 편지(3)

by 천년초

필로테아 님,

오랜만에 그대에게 편지를 봅니다.


그대는 어떠실지 모르겠으나 나는 몇 달 전부터 러시아 문화를 꽤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사 먹어 본 러시아식 소시지와 당근김치가 내 입맛에는 꽤 솜씨 좋은 밥도둑이기에, 그걸 계기로 더듬거리나마 키릴 문자도 읽어보고 영어 자막이 달린 구소련 시절 영화 "이반 4세"도 유튜브에서 클립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 영화에서 오프리치니크들이 "고이다(гойда/감탄사)"를 떼창하며 광란의 춤을 추는 장면은 명장면이니 그대도 언젠가 마음 내킬 때 한 번은 보았으면 합니다.


그런데 내가 러시아 문화 중에서도 그 영화만큼 철학적이라고 느끼는 것은 의외로 전통 인형 '마트료시카(Матрёшка)'입니다.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듯이, 마트료시카는 인형 안에 더 작은 인형이 들어 있는 구조를 몇 겹으로 반복합니다. 나는 그 인형의 사진을 볼 때마다 죽음 안에 삶이, 삶 안에 죽음이 들어 있다는 인생의 진실을 옛 슬라브 사람들이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따지고 보면 사람 생각이 어디서나 비슷해서 그런지 우리 조상들도 무덤을 임산부의 배 모양으로 만들고, 상여에 화려한 꽃을 달아서 죽음 속의 삶을 표현하지 않았던가요? 나는 비록 현역으로 사용 중인 꽃상여를 본 세대가 아니지만, 무덤에는 적지 않게 가 본 사람으로서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무덤이 불룩한 언덕 모양인 걸 볼 때마다 죽음이란 사실 생명이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자연스런 과정일 뿐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보면 삶이란 죽음을 향한 여정이고 죽음은 또다른 방식의 삶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죽음과 떼놓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은 죽은 후에 어떻게 되느냐?" 하는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물론 육체는 여러 작은 생물들에게 분해되어 또 다른 생명들을 지탱하는 양분이 되고, 그것도 물리적으로는 죽음 속에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이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영혼이란 것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세계에 있는지, 만약 있다면 그것이 육체를 떠난 이후에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되는지를 궁금해합니다. 사실 모든 종교며 사상이며 철학 같은 것들이 이 질문을 둘러싸고 수많은 답을 내놓지만, 누구도 확실히 알 수는 없고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면 속된 말로 누가 죽어 봤어야 알 텐데 죽은 사람은 저 너머가 어떤지 말을 못 하고,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필로테아 님, 나는 물론 신들의 존재를 믿는 유신론자이지만 사람에게 영혼이나 사후세계가 존재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예로부터 내려온 믿음을 존중해서 그런 것들이 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과학적으로 사람에게 영혼이란 없고 죽음이 최소한 개인으로서의 존재에 한해선 영원히 기능을 정지하는 일일 가능성도 크다고 봅니다. 내가 예전에 수술할 때 전신마취를 겪어 본 경험에 기반해서 말하자면, 사람 몸의 신경계로는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죽은 사람을 위해 제사상을 차린다던가, 담배를 태워 올린다던가 하는 일은 다 살아 있는 사람 마음이 편하자고 하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내가 "종교는 다 사기야" "문사철은 필요없어" 같은 말을 하지 않는 이유는,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할 수밖에 없고 그 사유를 돕는 것이 바로 종교와 인문학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기에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결정하는 걸 옆에서 도와주시는 분들로서 신들을 믿는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을 속된 말로 '나이롱 신자'라 하는지 모르겠지만, 영혼이 딱히 없고 사후세계도 없어서, 죽음으로써 나의 물리적인 존재가 끝난다 하더라도 나는 딱히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살면서 사랑을 한 행동들은 어떻게든 세상의 모양을 만드는 결과를 일으키게 될 것이고, 그것이 사후세계의 진상이라 할 수도 있으니까요. 사실 자신이나 다른 생명체, 나아가 세계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어떤 권력이나 사회 운동보다 더 확실하게 세상을 바꾸는 일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꼭 천국이나 지옥, 또는 발할라나 태양의 집이 있어야만 인생이 가치있는 걸까요? 물론 어떤 사람들이야 그렇다 하겠지만 내가 보기엔 살면서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지, 사후세계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지 않은가 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졌다고 해서 내가 생명의 가치를 경시한다거나 인생을 냉소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사람이 사랑하면서 살아가지 못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정말 잘 알기 때문에, 최소한 나 자신과 주변 생명체들이라도 확실히 사랑하려고 서툴게나마 노력합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나의 친가와 외가가 모두 폭력과 학대를 대물림해 왔기 때문에, 나는 미디어에 나오는 귀신이라는 것이 사실은 사랑이 부재한 삶의 흔적에 대한 메타포 아닐까 의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괴롭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슨 하얀 소복을 입고 꿈에 나오는 게 아니라 사랑의 대척점에 있는 폭력으로 얼룩진 인생의 기억을 남겨 주는 것이니까요.


필로테아 님, 나는 비록 사람을 대하는 솜씨가 서툴더라도 최소한 내게 소중한 존재들에게 내가 최선을 다해 사랑했노라고 말할 수 있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그것은 그대에게도 마찬가지라서, 비록 그대가 아직은 모르지만 열세 편의 편지를 다 채우는 날 그대에게 드리고자 이렇게 열심히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엔 죽음이란 끝이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동안 더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래서 옛사람들이 삶 속에서 가끔씩이라도 죽음을 기억하라고 했나 봅니다.


오늘의 편지는 고대 그리스 사람이 남긴 "세이킬로스 비문(Seikilos Epitaph)"의 내용을 인용하는 것으로 마치려 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 빛나고

비탄에 빠지지 말지어다.

인생이란 것은 짧고

시간은 제 몫을 요구하기 마련이니."


그대의 남은 날들이 사랑으로 반짝이길.

천년초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