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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Sep 18. 2016

바둑판을 떠나는 사람들

2년쯤 전에 쓴 글 

어릴적엔 헤어짐이 너무나 슬펐다. 학년이 바뀌어 반이 바뀔 때면, 여전히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헤어짐이 그리도 섭섭했다. 졸업식은 눈물바다였다. 헤어짐이란 매일 당연하게 보던 사람들을 더이상 당연하게 보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단단하던 한 조직을 벗어난다는 것은 낯설고 어색했다. 당연하게 보지 않으면 애써서 보지도 않을 관계들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달은 건 시간이 많이 흐른 후였다. 


우린 꽤 자주 어떤 집단에 들어간다. 그 집단을 몇해전 감명깊게 본 드라마 <미생>의 용어를 빌려 바둑판이라 칭해 보겠다. 모두들 각자의 바둑판 위에 각자의 바둑을 둔다고 했던가. 중고등학교와 같은 집단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꽤 단단한 바둑판이었다. 그 바둑판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은 실패를 뜻하지 않았다. 당연히 주어진 기간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바둑판으로 옮겨가는, 여러 종류의 방황이 용인되는 성장과정일 뿐이었다. 


새로운 바둑판부터 우리는 각자 천차만별로 다른 모양의 바둑을 두기 시작한다. 스무살이 되고 학교를 빠져나와 새로 들어서는 바둑판부터 말이다. 나의 경우엔 대학교라는 바둑판에 들어갔다. 기존에 바둑판을 꾸려나가던 사람들은 새 바둑돌의 등장을 환영했다. 신입생 환영회 어쩌고저쩌고. 새로운 바둑돌들을 환영하는 행사는 한동안 계속됐다. 헤어짐과는 거리가 먼 바둑을 뒀다.


‘우리가 우리가 되기 위해선 대기업에 들어가야 해.’


<미생>에서 이상현이 한 말이다. 그는 모르긴 몰라도 평탄하게 성장해 명문대에 진학했고, 이제 당연한 수순으로 대기업이라는 바둑판으로 자신의 위치를 옮기고자 하는 듯하다. 원인터네셔널에 인턴으로 입사했고, 정규직 전환에 실패했다. 그런 그에게 자신을 제치고 입사PT를 통과한 고졸 장그래는 곱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를 이기적이라고 칭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나도 처음엔 장그래를 흉보며 울분을 토해내는 그의 대사가 이해되지 않았다. ‘우리가 우리가 되기 위해선 대기업에 들어가야 해.’ 이 말을 듣고는 한참을 생각한 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대학이라는 바둑돌에서 만난 바둑돌들은 다들 다양한 개성과 특기, 성격을 갖고있는듯 했지만 다들 비슷하고 무난한 삶을 살아온 바둑돌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의,우리들의 다음 바둑판은 당연한듯 취업으로 예정되어있었고, 무사히 안착한 바둑돌이 있는가 하면 갈 길을 잃어버린 바둑돌들도 있다. 신입생들을 열렬히 환영하던 대학의 들뜬 바둑판은 5년즈음 지난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이상현의 말 그대로, 이러저러한 곳에 '들어간' 사람들만이 ‘우리’가 되어 남아있었다. 좀 거칠게 표현하자면 말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어디서 뭘 하는지 물어물어야 겨우 ‘어떻게 지낸다더라’라는 소식이 얼핏 들릴만큼 소문의 거리에서 멀어져 있었다.


언젠가부터 새로운 바둑판으로 옮겨가며 부푼 기대를 품지 않고, 바둑판의 바둑돌들도 새로운 바둑돌들을 20살의 그때처럼 열렬히 환영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만날 땐 언젠가 헤어질거라는 전제를 나도 모르게 깔고, 농담을 주고 받으면서도 언제까지나 이사람과 함께하진 못할 거란 걸 안다. 


무언가를 ‘준비’하는 바둑돌일수록 그러했다. 내가 지금 속한 이 아슬아슬한 바둑판엔, 영원히 안착하는 바둑돌이란 없다. 다들 여기서 무언가를 열심히 준비해서 하루빨리 더 안정적인 바둑판으로 자리를 옮기고자 하는, 또렷한 목표를 맘 속에 품고 있었다. 괜찮은 바둑판으로 무사히 옮겨가는 이른바 성공적인 바둑돌이 있는가 하면 그 바둑판은 내 길일 아님을 깨닫고 쓸쓸하게 ‘비행장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다. 잠시 머무는 곳이라 할지라도 올해 뜨거웠던 여름, 한 바둑판 위에 같은 공기를 마시고 오늘과 내일의 날씨를, 1년뒤의 미래를,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이상을 주고 받았던 바둑돌이 바둑판을 떠난다는 것은.  꽤 슬픈 일이다.


하지만 난 더이상 고교시절의 내가 아니기 때문일까. 헤어짐이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닌데 갈수록 헤어짐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잘가란 말 한마디 내뱉기가 두렵다. 정규교육을 마무리하고 바둑판을 내려오던 우리가, 불과 강산이 반정도 바뀐 후 지금 만들어놓은 새로운 바둑판의 사정은 꽤나 복잡다단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설명하기 힘든. 현실, 생활, 더이상 품기 힘든 꿈과 같은 것들이 날 바둑판 끝으로 자꾸만 밀어냈기 때문에.


다음 바둑판이 무엇이 될지는 모를 일이다. 나도 지금 내가 있는 이 아슬아슬한 바둑판에서 언제 스스로 이별을 고하고 내려올지 모른다. 하지만 그 이별이 곧 패배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 믿는다. 주변의 친구들도 모두 새로운 바둑판을 찾느라 분주하다. 각자 어떤 바둑을 두고 있는지 궁금해 하는 것 조차 실례가 되는 요즘이다. 먼저 번듯한 바둑판에 새로운 자리를 꿰찬 바둑돌도 있고, 아직 가야할 곳을 못찾고 방황하는 바둑돌도 있으며,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쉽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 바둑판 앞에 수없이 좌절하는 바둑돌도 있다. 그 순서가 중요할까, 새로운 바둑판의 크기가 중요할까. 바둑판 위의 내가 중요할까, 다른이가 바라보는 내 바둑판이, 그 위의 내가 중요할까.


비행장을 떠나면서 사랑이 오래전에 떠난 사막에 핀 붉은 꽃을 기어이
보지 못했지, 입술을 파르르 떨며 꽃이 질 때
비행장을 떠나면서 우리들은 새 여행에 가슴이 부풀어
헌 여행을 잊어버렸지, 지겨운 연인을 지상의 거리, 어딘가에 세워두고
비행장을 떠나면서 우리들은 슬프면서도 즐거웠지 (허수경,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에서)


중요한 건 고민을 멈추지 않는 것이라는 그저 그렇고 또 그저 그런 대답을 무책임하게 내던지면서 난 다시 아슬아슬한 바둑판 위로 돌아간다. 나만의 바둑을 둔다.


‘하지만 반집으로라도 이겨보면, 다른 세상이 보인다.
이 반집의 승부가 가능하게 상대의 집에 대항해 살아준 돌들이 고맙고,
조금씩이라도 삭감해 들어간 한 수 한 수가 귀하기만 하다.
순간순간 성실한 최선이, 반집의 승리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이 글의 결론은 2년 전에도, 지금도 역시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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