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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Sep 18. 2016

내가 9월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주 오랜만에 쓰는 글

'구월에 훈훈한 봄바람이 한창 부니 도처에서 좋은 소식이 들리고 염원하던 일을 이루어 화색이 만면하리라.'


9월 초에 전주로 여행을 갔다. 전주 한옥마을에 천 원을 넣고 올해의 운세를 뽑는 기계가 있었고, 친구들과 재미로 하나씩 뽑아보았다. 원래 사주,운세 같은 건 잘 믿지 않는다. 행여나 나쁜 말이 나올까, 그 말을 내가 믿어서 자신감을 잃어버릴까 지레 겁을 먹는 성격이기 때문에. 그런데 웬걸. 이번에 뽑은 운세는 구구절절 좋은말만 쓰여있었다. 심지어 총람 중 한 구절은 이러하다. '용이 천문을 열으니 구름이 걷히고 비가 내리는 운이로다.' 이 구절 외에도 좋은말만 적혀있어서 조금 우울해진다 싶으면 운세를 꺼내 읽었다.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 올해는 되는 해라니까. 뭘해도 되는 해래. 사주,운세는 믿지 않는다면서.


작년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늘이 무너지거나 땅이 꺼져버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살아날 구멍같은건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 습기가 가득한 초여름의 버스 안이었다. 그 다음의 일도 기억난다. 집에 들러 꾸역꾸역 화장을 하고 대학로 씨지브이에서 매드맥스를 봤다. 미술관에 가서 기분전환을 하고 맛있는 것도 잔뜩 먹었다. 그리고 텅빈 집에 돌아와 엉엉 울었다. 옆방에 다 들렸을지도 모를만큼, 말 그대로 엉엉 울었다.


그날 외에도 이상한 날은 많았다. 사당에서 열차를 타고 한강을 지나는데, 그리고 이어폰에선 평소 즐겨듣던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너무 슬퍼서 또 눈물이 났다. 아직도 그 노래가 기억난다. '삶이 뜨거워진 어느 날 나는 거리로 나왔죠 다 무너져가는 골목 어귀에 한 아이가 울고 있었죠 도대체 왜 저 아이는 홀로 나와 눈물을 흘리는 걸까 울다가 울다가 울다가 지쳐 어디론가 돌아갑니다'


또 작년. 잠실 백화점 지하에 뜬금없는 소원트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소원을 눌러적어 걸어뒀다. '긍정이란 걸 인정하게 해주세요 그래서 뭐든 힘내서 할 수 있게요' 도통 긍정이라곤 떠올리기 힘든 해였다. 지금 돌이켜봐도 얼마나 힘들었나 가늠하기 힘들다. 다들 힘든시기가 지나면 그 힘듦을 어느정도 미화해서 기억하니까. 초라하고 구린건 애써 떠올리고 싶어하지 않고 멋들어진 영웅서사로 만들고싶어하니까. 구질구질한것보단 덤덤하고 쿨한게 멋지니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길 맘속깊이 바랐던 그날로부터 일년하고도 몇 달이 더 흘러 9월이 되었다. 힘들고 구질구질했던 시절의 내 모습은 한톨도 남기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지난 1년간은 사진도 몇 장 없고, 일기도 거의 쓰지 않았다. 어떤 생각이 떠오르고 기록하고 싶을때도 속으로 되뇌었다.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가끔 좋은 책이나 영화를 봐도 거기서 그만이었다. '생각하지 마세요 생각하면 늦어버려요' 경제학의 법칙을 마음에 새겼다.


생각하기를 멈추고 한동안 시간을 보냈더니, 다시 무언가를 쓰는 것이 너무 겁이 난다. 그냥 내 일기를 쓰는 것뿐인데. 지난날 썼던 글들을 한참동안 읽어보았더니 너무 부끄럽다. 그것도 내 일기였을 뿐인데. 그래서 오랜만에 다시 쓴 일기의 제목은 내가 좋아하는 9월에 대한 것으로 붙여 보았다. 나는 9월을 가장 좋아한다. 9월의 첫째날 태어나 9월은 한 달 내내 생일파티를 하는 기분으로 살아간다. 올해의 9월도 그랬다. 다시 세상으로 나와서 친구들도 많이 만나고 이것저것 많이 생각하고, 사진으로 남기려고 노력하고 있다.  


어찌됐든 9월은 한 해 중 내가 제일 사랑하는 달이고, 내가 나를 가장 사랑하는 달이기도 하다. 자존감이라는게 하늘을 찔러 며칠 전 받았던 인성검사 시험지의 '나는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한다'는 질문지에 무려 '매우 그렇다'라고 답했다(..)


시간이 더 흐르면 저런 생각을 했던 날의 괴로움따위는 까맣게 잊고 다리 한쪽을 꼬고 오만하게 말할 지 모른다. 다 별 거 아니라고. 별 것 아닌것도 별 거였고, 별 것인 것도 별 것 아니었다. 아직 갈 길은 멀고 앞으로도 별 것과 별 것 아닌 것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을테다. 내가 이런 뒤죽박죽인 일기를 쓰는 이유는 뭘까. 그냥 그런날이 있었다는 것 정도. 하늘은 무너지지 않고 땅은 꺼지지 않으며 내일은 또 눈을 떠 하루를 보내야 한다는 것 정도. 어차피 인생을 망쳐버릴 용기도 없는 겁쟁이를 위해  몸소 망해줄 사려깊은 세상은 없다는 것 정도. 지금처럼 내가 나를 너무 사랑하던 스물여섯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두고 싶다 정도.


그리고 올해도 9월은 아름다웠고, '우리들은 젊었고 여름이었고 여름밤은 길었고 아름다웠다'는 것 정도.  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기 바라는 컴컴한 날이 찾아오면 어떻게든 다시 돌아올 9월을 기다리라는 것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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