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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Sep 19. 2016

내가 몰랐던 세상의 이야기들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글 

연휴의 마지막 날. 추석에 느낀 짧은 생각들을 가볍고 유쾌하게 쓰려고 했다. 하지만 오늘의 글은 그다지 가볍지도 유쾌하지도 않을 것 같다.


내일이 월요일이라고 우는소리를 하던 중 친구 한 명이 말을 꺼냈다. 우리과에서 일어난 성폭력 사건에 대해 아냐고. 대학 같은 과 친구들이 함께 있는 대화창이었다. 알 턱이 없었다. 나는 벌써 졸업한 지 한참 된 졸업생이었으며, 페이스북을 하지 않아 학내소식을 전해듣지도 못했고, 연락하는 학과 동기라곤 대화창에 속해있던 두 명이 전부였으니. 사건의 전말을 듣고 우린 멍해졌다. 미쳤다, 환장하겠다, 소름끼친다, 정말 할 말이 없다.


2학년 과대표가 1학년 학우를 상대로 한 성폭력 사건이었고, 단과대차원에 성폭력사건대책위원회를 통해 가해자를 피해자로부터 차단시키는 차원에서 정리된 모양이었다. 공식적인 대자보를 통해 알게된 거라 그 사이의 자세한 일들에 대해선 모르지만 말이다. 최근 대학 내에서(그리고 어디에서나) 이런 불미스런 일들이 터져나오고 있다. 남학생 단톡방 사건은 이미 주요 대학마다 한 건씩 터져 나온 것 같다. 논란이 되었던 단톡방 사건 중 하나는 내 동생이 속한 학교의 동기들이었다. 동생은 피해자도 가해자도 다 아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친구는 말했다. '요즘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일들이 내 주변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다'고. 이런 일들이 갑자기 일어나는 걸까. 요즘 아이들이 점점 이상해지는 걸까. 당연히 절대 아니다. 이런 일은 항상 있어왔고, 어쩌면 더 심한 일들도 있어왔고, 이제야 하나둘 공론화가 되는 것일게다. 나는 세상의 너무 일부만 알고 살아왔던 것 같다. 운이 좋게도 말이다. 


이제와서 내가 모르던 세상의 이야기들을 들춰보는 건 정말 유쾌하지 않은 일이다. 내가 모르는 수많은 단톡방에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 상상하고 싶지 않다. 새로 만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도끼눈을 뜨고 경계하고 싶지도 않다. 예전엔 모든 게 편했는데. 사람들은 착했고 아무일도 없었고 우린 모두 사이가 좋았는데. 갑자기 왜 모르던 세상의 이야기를 들추어 내서 불쾌함을 느끼는 거냐고 물을 지도 모른다. 


위에서도 말했듯, 이런 일들은 항상 있어왔기 때문이다. 얼마전 친구는 자신이 신입생때 간 학과 엠티에서 선배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던 일을 이야기했다. 당시엔 분명히 잘못된 걸 알면서도 무서웠고, 수치심이 들었고,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고 도망치듯 엠티장소를 빠져나왔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일'들이 여기저기서 떠올랐다. 어수룩해서 잘못된 걸 몰랐고, 설령 알았다고 해도 용기가 부족해 쉬쉬했던 일들이었다.  


지난 5월. 강남역을 찾았다. 강남역 10번출구로 나와 내가 가장 먼저 본 광경은 추모하는 사람들의 다리를 찍은 몰카범이 경찰에 잡혀가는 모습이었다. 아수라장이었다. 내가 모르는 세상들을 조금만 더 빨리 발견했다면, 잘못됐다는 걸 더 빨리 깨달았다면,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잘못된 것임을 크게 외쳤더라면, 그 어린나이에 그 곳에서 그렇게 죽는 일은 없었을텐데. 정말 슬펐고, 미안했다.


그리고 무서웠다. '이런 일'들은 단순히 불쾌한 감정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실재하는 위험이다. 귀가하던 골목길에 만난 괴한을 뿌리치고 건물 번호키를 재빠르게 누르던 날이 생각났다. 집 앞까지 따라오던 낯선 이를 돌려보내기 위해 큰길에서 한 시간 내내 설득했던 날도 생각났다. 주머니엔 호신용품을 챙기고 아무리 지쳐도 씩씩하게 걸을 것, 지친 발걸음은 범행의 대상이 되니까. 혼자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들었던 말들.


언젠간 글로 쓰고 싶었던 주제였는데 이렇게 불쑥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더 많이 공부하고 열심히 싸워서 다시는 이런 희생자가 없는 세상이 되도록 노력하자. 지난 5월의 다짐을 이제야 다시 떠올려본다. 긴 연휴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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