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불어서 쓰는 글
그냥
이라는 말 속에는 진짜로 그냥이 산다.
아니면 그냥이라는 말로 덮어두고픈 온갖 이유들이 한순간 잠들어 있다.
그것들 중 일부는 잠을 털고 일어나거나 아니면 영원히 그 잠 속에서 생을 마쳐갈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그냥 속에는 그냥이 산다는 말은 맞다.
그냥의 집은 참 쓸쓸하겠다. 그냥이라고 말하는 사람의 입술처럼 그렇게.
(이승희,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중)
찬 바람이 분다. 낮엔 아직 덥지만 아침저녁으론 차가운 바람이 분다. 이불을 덮고 있어도 으스스한 기분이 들어 손발을 한참 오그리고 있어야 잠에 든다. 여름의 끝자락인 것이다. 올해는 많은 사람들이 찬바람이 불기를 꽤 기다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더운 여름이었기 때문에. 난 사계절 중 여름을 가장 좋아한다. 스무살 이전까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을 물으면 망설임 없이 겨울이라고 대답했었는데, 서울의 혹독한 겨울을 한 차례 겪은 후 여름을 가장 좋아하게 됐다. 봄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봄이라는 계절이 주는 설렘이나 새로운 시작 이런 것들의 강박이 달갑지 않다.
어쨌든 찬 바람이 분다. 여름을 좋아하지만, 이번주 쯤 슬슬 추워졌으면 하고 바라던 찰나였다. 여름이 지겹거나 한 것은 아니고, 지난 주말에 가을옷을 잔뜩 샀기 때문이다. 찬 바람이 부니까 친구들이 보고 싶다. 요 며칠, 저녁에 택시타고 이동할 수 있는 거리에 친구들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딱히 할 말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카페 같은 데서 음료와 디저트를 시켜놓고 '올해도 벌써 다갔네'따위의 말을 주고 받고 싶은 그런 기분. 왜 이런 기분이 드는건지 모르겠다. 가을이란 단어가 들어간 노래가 많기도 많다. 다들 가을이 오면 싱숭생숭 한가보다.
남산에 가고싶다. 난 주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남산에 올랐다. 사실 남산에 가고싶은 기분은 최근에 본 영화 '최악의 하루'의 영향이 크다. 나는 지방에서 온 촌스러운 이방인이었고, 남산과 같이 서울토박이들은 좀처럼 가지 않는 서울의 랜드마크들을 참 좋아라했다. 물론 더 자주 간 것은 혜화동에 있는 낙산이다. 낙산에 오르면 저 건너편 남산타워의 불빛이 보인다. 사실 '최악의 하루' 예고편을 보고선 낙산이 배경인가 하고 기대했었는데, 역시 아니었다.
찬 바람이 부는 날씨는 낙산에 오르기 가장 좋은 날씨다. 로맨스 소설의 레전드라고 불리는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이란 책을 불과 몇 달전에야 읽었는데, 그 책 속에 낙산이 배경으로 자주 나와서 반갑고 좋았던 기억이 난다. 난 낙산에 오르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오르막 직전에 있는 슈퍼에서 맥주를 한 캔씩 사서 꼭대기까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오르고, 맥주를 마시고 내려오면 딱 기분이 좋다. 여름엔 덥고, 더위를 피하는 사람도 많고, 모기도 많다.
찬 바람을 반기며 마냥 사색에 잠기기엔 좀 불안한 때이기도 하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엔 일주일 간격으로 지진이 일어나고 있다. 평생 살면서 지진이라곤 느껴본 적이 없는데 요즘 지진의 공포를 몸소 느끼고 있다. 추석 전에 일어났던 지진은 정말 무서웠다. 사실 그보다 센 지진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큰 자연재해 앞에서 개인인 내가 대비할 수 있는 게 있는지 모르겠다.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겠지.
벌써 찬 바람이 분다. 매번 하는 말이지만 올해는 참 빠르게 지나갔다. 예전에 시간이 빨리 흘러간다는 것은 그만큼 기억할 것들이 줄어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올해의 절반은 정말 기억할 일이라곤 없이 아침부터 저녁이 똑같은 삶을 보냈으니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9월은 이것저것 많이 하고 알차게 보내고 싶었는데, 벌써 시월이 코앞에 와있다. 곧 있으면 '잊혀진 계절'을 들으며 시월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또 곧 있으면 거리에 캐롤이 흘러나오고, 또 곧 있으면 한 살 더 먹는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겠지.
찬 바람이 분다는 이유로 벌써부터 한 해가 다 간 것 같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