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영화 그리고
다자이 오사무가 그랬던가. '영화관은 겁쟁이가 울러가는 곳'이라고. 20대 초반의 나는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나를 덮칠 때면 영화관으로 도망쳤다. 특히, 삼청동 초입 한 건물의 지하에 있던 영화관은 언제나 내가 도망치고 싶을 때 향했던 나만의 아지트였다. 그 누구도 데려간 적 없던, 나만의 공간이었다.
20대 후반의 나이로 접어든 난 여전히 막막한 기분을 마주할 때면 가장 먼저 영화관을 떠올린다. 물론 지금은 아무때나 영화관으로 달려갈 수 없다. 남는 시간엔 잠을 우선순위에 두고, 못만난 친구 만나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고, 술을 우선순위에 두고, 뭐 이래저래 하다 보니까, 내 안식처와 멀어진지도 꽤 오래다. 그래도 여전히 날 가장 편하게 하는 공간은 불꺼진 컴컴한 영화관이다.
나 지금 영화관이 필요해. 지난주 내내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다. 그리고 지난 토요일 해질 무렵, 영화관을 찾았다. 멀리 갈 체력도 열정도 남지 않은 난 집 근처의 영화관을 찾았다. 다행히 그곳 또한 내가 굉장히 사랑하는 영화관이다. 영화관 창 밖으로 분홍빛 노을이 지고, 블라인드가 내려오며 상영관의 불이 꺼지고, 별다른 광고 없이 영화가 시작한다. 그날을 시작으로 광복절이 낀 연휴동안 난 여러편의 영화를 봤다.
1. 내 사랑(Maudie)
분홍빛 노을이 지던 날 극장에서 본 영화. 아주 사랑스러운 영화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상영관을 꽉 채운 관객들의 옅고 행복한 웃음소리가 날 더 행복하게 했던 영화. 어딘가 부족한 사람들이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사랑 이야기이자, 겉으론 약해 보이지만 누구보다 강인한 한 여자의 삶 이야기였다. 최근에 서울의 하늘이 꽤 예뻤다. 만화에나 나올법한 몽실몽실한 구름이 하늘에 깔려있었고, 해질녘이면 분홍빛 노을이 서울하늘을 뒤덮었다. 이 영화엔 언제나 그런 구름과 노을이 존재한다. 그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들이마시는 기분이 든다. 모드는 자신의 삶의 영역에 더이상 침범하지 말라며 선을 긋는 에버렛에게 말한다. '난 당신을 좋아하고, 당신은 내가 필요해.' 담백하고 명료한 고백이다. '내 사랑'이라는 한국제목이 어울리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포스터는 아주 예쁘고, (내가 좋아하는 분홍빛 노을이 배경이다) 한장 가져와 벽에 걸어두었다. 이 영화를 떠올리면, 늘 분홍빛 노을을 자랑하던 서울을 하늘들, 극장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빛, 그리고 영화속 장면들이 떠오를 것이다. 분명 오래오래 행복한 기억이 될 것이다.
2. 소셜포비아
집에 돌아와서 어쩐 일인지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당시엔 이 영화의 소재가 너무 과한 설정이라 여겨졌는데, 최근에 더 잔인한 현실로 곳곳에 드러나고 있어서 그럴까,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다. 행복한 영화를 보고 나면 어쩐지 조금은 어두운 영화를 봐서 그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이상한 강박이 있다. 그래서 이 영화를 선택했을지도. 픽션이라 여기기엔 너무 아픈 현실이었다. 한 여자 네티즌에게 보복한다며 찾아가는 유명BJ와 신체 건장한 남자들. 아파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시체를 발견하고 트위터 글부터 지우는 잔인함. 그들의 행동을 비꼬는듯 흘러가는 흐름은 좋았지만, 가해자를 대변하는 듯한 시선과 문제의식의 단편성은 아쉬웠다.
3. 매기스플랜
다시 행복한 영화다. (뜻하지 않게 며칠사이에 에단호크가 나오는 영화를 둘이나 봤다. 에단호크가 나오는 줄은 모르고 봤다.) 말 그대로 매기의 계획에 대한 이야기다. 이 영화에서 매기의 계획은 두가지가 나오는데, 역시 인생의 모든 일이 그렇듯 계획대로 흘러가진 않는다. 매기는 계획에 없이 사랑에 빠지고, 계획에 없이 그 사랑에 질린다. 그래서 또 다시 다음 계획을 세우는 식이다. 그냥 '장미'에 물을 주는 '정원사' 역할을 하며 계속 살아가는것은 '낭비'라 여기고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겠다는 매기의 당찬 계획이 조금 오지랖같긴 하지만, 그것 또한 매기의 성격이며 삶의 방식이다.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은 우디앨런의 영화를 떠올릴 것이다. 뉴욕을 배경으로 했고, 쉼없이 웃음을 자아내는 쫀쫀한 대사들이 그러했다. 그치만 우디앨런 영화와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면, '나이든 남자와 젊은 여성'의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의 영화들과는 달리(점점 심해진다) 매기스 플랜은 매기라는 젊은 여성의 계획대로, 의지대로 극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시대 흐름과도 걸맞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 또한 보는 내내 날 행복하게 만든 영화다.
4.서울역
부산행의 프리퀄.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이다. 노숙자, 좀비, 성매매, 부동산, 폭력, 살인. 또 다시 균형을 맞추겠다는 영화 선택이었을까. 부산행 열차에 올라탄 좀비들이 어디서 시작되었나를 보여준다. 좀비바이러스는 한 노숙인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이유는 등장하지도 않고, 딱히 중요하지도 않다. 이 영화에서 좀비보다 잔인한 것은 인간이며, 차라리 좀비가 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게 만드니까. 수많은 좀비들로부터, 겨우겨우 도망쳐 목숨을 건진 혜진은 좀비보다 몇배로 잔인한 인간을 맞딱뜨린다. '왜 내 돈 떼먹고 도망가, 이년아.' 좀비로부터 살아난다고 해도 그들은 돌아갈 집이 없다. 돌아갈 집이 없는 사람들, 비싼 아파트의 모델하우스, 지하철역 벽면에 등장하는 용산의 아파트 광고, 좀비로부터 도망친 산 사람들을 향해 물대포를 쏘고 최루탄을 던지는 공권력. 거칠고 직설적인 영화다.
며칠 째 비가 내린다. 밤에는 에어컨을 틀지 않아도 창틈새로 쌀쌀한 기운이 비집고 들어와 조금 춥게 느껴질 정도다. 오늘도 퇴근 후에 너를 만났고, 너무 고되던 하루에 대해 얘기했고, 서점에서 읽고싶은 책을 한권씩 사서 나란히 앉아 책을 읽었다. 언제나처럼 10시무렵에 헤어졌고, 집에 달려와 맥주를 곁들여 일기를 쓴다. 매기처럼 나도 터무니없는 계획을 몇가지 세우는데, 그 계획 중 하나는 널 만난지 일 년쯤 되는 날에 너를 영원히 보지 않겠다는 계획이다. 굳이 그렇게 해야하나 싶지만, 내 인생을 좀더 '낭비'없이 꾸리고 싶은 욕심이자, 먼저 상처받지 않겠다는 몸부림이랄까.
물론 정말로,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던 삼청동 초입의 영화관은, 15년 10월 문을 닫았다. 당시 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기를 지나고 있었고 그렇기에 기록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중에 영화관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듣고, 오래도록 덮어뒀던 일기장에 몇글자를 써뒀더랬다.
'분명 내 인생의 길이와 공간의 길이가 일치할 수 없을 테다.
하지만 어긋남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 숨이 차다. 내 감정은 여전히 느리다.
그곳에서 봤던 영화를 떠올려보고, 그 영화를 봤던 이유를 되새겨보고,
지하를 빠져나와 밝은 빛을 마주할 때의 마음을 생각해본다. 스스로를 위로하는 법을 알려줬다.
내 인생 매뉴얼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공간이다.
다시 돌아갔을 때 낯선 공간으로 바뀌어있겠지만 잊지 않을것이다.
20대 초반의 겁쟁이었던 나에게 그곳이 일러줬던 것들을.
마지막 인사도 하러가지 못해 미안하다고. 나만의 방식으로 꼭 기억하고 보답하겠다고.'
기록하지 않으면 내 하루도 없던 일이 된다. 기억하지 않으면 뭐든지 잊혀진다. 애써서 기억하고, 시간내서 기록하자. 결론이 이상하지만, 난 요즘 이런생각을 하고 살고있다. 여름이 끝나간다.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 없지만 또다시 찾아오는 누군갈 위해서 남겨두겠소. 다짐은, 세워올린 모래성은 심술이 또 터지면 무너지겠지만.' 오늘 하루도 끝이다. 내일도 부디 무사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