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동네를 찾아가는 일
혜화에 가고싶은 때가 있다. 서울에 올라와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동네라서도 그렇고, 가장 처음 만난 동네여서도 그렇고, 그냥 그 동네가 너무 좋은 공간이어서도 그렇다. 1월쯤이었나. 정신없이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던 때 괜히 혜화에 가고싶어 졌던 날이 있었다. 그 주 주말 무작정 혜화로 갔었다. 이제 만날 사람도 거의 없는 그 동네에 혼자 가서, 대학로 씨지비에서 영화를 한 편 보고 자주가던 카페에 앉아 별 쓸데없는 말을 끄적거리다 캄캄해지고 나서야 돌아왔다. 잃어버린 초심(?)을 찾겠다는 명목이었는데, 초심이란게 뭔지도 모르겠고, 초심이란 게 그 동네에 있을리도 없고, 초심이란 걸 꼭 찾아야하나는 결론에 이르렀던 것 같다.
아무튼. 이번주도 문득 혜화에 가고싶었다. 이번엔 무작정 찾아가지 않고, 혜화에 여전히 남아있는 옛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이번 주말에 혹시 혜화에 있니. 혜화에 가고싶어서.' 친구는 토요일이 좋다고 했고, 토요일 오후에 만나기로 했다. 삼청동에서 한 강연을 들으려고 접수를 해놨다고, 혹시 시간 괜찮으면 같이 가겠냐고 물었다. 같이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 우리는 종종 이런저런 강연을 같이 들으러 다녔다. 시청역 어딘가에서 같이 강연을 듣고 청계천까지 걸어오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기도 했고, 비슷한 직종 취업을 준비하면서 관련된 강의들을 함께 듣기도 했다. 어떤 주제의 강연인지도 모르고 덜컥 듣겠다고 약속했고, 전날밤의 숙취가 채 가시지도 않은 채 안국역으로 갔다.
'고전의 탄생'. 강연의 주제였다. 토요일의 삼청동 길은 엄청나게 붐볐고, 강연시작 전 커피를 사가기 위해 들른 카페는 머리가 울릴정도로 시끄러워 이야기를 하기위해선 있는 힘껏 소리를 쳐야할 지경이었다. 얼른 조용하고 차분한 강연장소로 가고싶었고, 조금 빨리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이런 본격적인 강의는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가, 불이 꺼지는 순간 엄청나게 설렜다. 마침 강연자도 대학 교수님이었고, 마치 학부생때로 돌아간듯한 느낌이 들면서, 다시 학교를 다니고 싶다, 뭔가 공부하고 싶다는 뜬금없는 기분이 들었다. 어떤 사람은 이 어려운 주제의 강의를 들으러 오는 이유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라고 말했는데, 그 사람의 마음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바깥 세상이 얼마나 북새통인지 까맣게 모른채 고요한 지하 강연장에서, 현실의 온갖 복잡한 문제와는 관계없는 그리스 고전에 대해 생각하는 자리라니. 내 현실이 어떻든 그리스 고전 문명에 대해서만 두시간동안 생각할수 있다니.
강연이 끝나고, 우리는 정말 혜화로 향했다. 난 대학로 거리를 거닐면서, 어 여긴 ㅇㅇ가 있었는데, 바뀌었구나. 어, 여긴 내가 진짜 자주갔던 곳인데 없어졌네 류의 이야기를 하길 정말 좋아한다. 같은 추억을 공유하지 않은 사람이 듣기엔 한없이 지루한 중얼거림일테지만. 혜화에 간다면 꼭 들러보고 싶었던 식당들이 모두 웨이팅이 너무 길거나, 이미 마감을 한 상태여서 친구가 잘 아는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고, 예전에 자주 갔던 '주말 대학로에 이렇게 조용한 곳도 있을수 있다니' 싶은 칵테일 바에 가 칵테일을 한잔씩 하고 헤어졌다.
특별한 일은 없었다. 평소에 만날때와 같이 근황이야기를 좀 하다가, 좀 툴툴거리다가, 좋았던 이야기도 하고. 난 그 동네를 떠난지 오래됐지만 그 친구를 만날때면 꼭 동네친구를 만난것 같은 편안함을 느낀다. 같이 동네 카페에서 자소서쓰던 일, 성북천을 걸으면서 운동하던 일, 나중에 취직하고 안정되면 가자고 점찍어둔 술집들 같은 이야기를 버릇처럼 이야기하며 다음에 또 만나자 그때까지 잘지내 하며 헤어진다. 별다를것 없던 하루. 혜화에는 역시 초심도 없고 답도 없지만 난 그 동네가 좋다. 내 고향은 너무 멀어서 맘먹지 않으면 찾아가기가 힘든데, 내 마음의 고향같은 이 동네는 맘만 먹으면 언제든 찾아올 수 있으니 존재만으로도 고맙다.
소나무길에서 만난 고양이 세마리. 귀여운 고양이들도 있다.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오늘의 감상을 휴대폰에 짧게 끄적이다가 집에 오자마자 브런치를 열어 일기를 써둔다. 블루투스 키보드를 샀거든. 반응속도도 빠르고 아주 좋다. 열두시가 넘었지만 전혀 조급하지 않다. 내일은 일요일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