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04
결정할 때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 고민이 있으면 스스로 따져보고 다 결정을 내린 후에 다른 사람한테 조언을 구한다. 줄여서 답정너.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넌 내가 듣고싶은 대답을 해줘.
먼 곳에 온 첫 날의 마음은 싱숭생숭하다. 알람을 열 개도 넘게 맞춰놓고 알람소리보다 3분 일찍 잠에서 깬 아침, 처음 보는 사람들, 처음 보는 풍경, 잘 모르는 길들. 어제 걱정했던 대로 자기소개를 수없이 했고, 기억도 잘 나지 않는 남의 이름을 수십 번 들었으며, 그때마다 손목이 아프도록 박수를 쳤다. 다행히 커피는 가격이 매우 싸고 맛있다. 때마침 몹시 피곤한 하루였고, 커피를 두 잔이나 마셨다.
사전 시험을 봤는데, 기준에 미달하는 점수를 받아 내일부턴 '나머지 공부'를 하게됐다. 정말 낯선 단어지만 내가 아예 준비를 하지 않고 봤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난 찍기에 재능도 없고, 운도 없으니까.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한다. 이 직업을 선택한 이상 평생 알아야하는 법조문들을 지금 공부해두지 않으면 평생 내 뒤를 귀찮게 따라다닐 것이니까.
같이 다니는 사람도 몇 생겼다. 대체 존댓말이란 뭐기에 '말씀 편하게 하세요'를 수 번 반복하고 나서야 겨우 말을 놓았다. 아직도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쓴다. 별로 인상이 좋지 않은 사람도 있다. 굳이 남의 험담을 쓰고싶진 않다.
낮엔 몹시 더웠다. 지난주였나, 찬 바람이 분다고 일기를 썼던 것 같은데 그날 이후로 줄곧 덥기만 하다. 그때 사둔 가을 옷들을 제대로 입어보지도 못한 채 겨울이 올 것 같다. 해가 지면 그래도 꽤 쌀쌀하다. 여기선 자전거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데, 다음에 시간이 나면 자전거를 타고 한바퀴 돌아보고 싶다. 당분간은 나머지 공부를 해야해서 힘들 것 같지만.
모든 일정이 끝난 건 아홉시가 다 된 늦은 시각. 먼저 입교해 있던 아는 사람이 있어 잠깐 카페테리아에서 만났다. 결정을 잘 내리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또 들어와보니까 그냥 다른 직렬로 갈까 고민이 된다고 구구절절 털어놓았다. 사실 이 고민은 예전부터 많이 털어놓았던 것들이다. 다른 직렬을 권했던 사람들의 이유는 딱 하나로 수렴됐다. "여자가 하기엔 더 좋아, 그게 일이 더 편해." 다행히 카페테리아에서는 내가 듣고싶은 대답을 들었다.
왜 듣고싶은 답을 정해놓고 다른사람한테 고민을 털어놓는 걸까. 어차피 답은 없는 거니까 그런 걸 게다. 한 십 년 후쯤에 내가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떻게 살고 있을지 가서 보고 오고 싶지만, 그 누구도 그럴 수가 없으니까. '여자가 하기에 더 좋고 편한' 일이 오히려 적성에 맞지 않은 여자사람도 있을 것이다.
십대 때 이런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때의 최대 고민은 대학에 가는 거였고, 미래로 가서 내가 좋은 대학에 갔는지 가지 않았는지만 알고 돌아오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됐는지 미리 답을 알면 마음이 편하니까. 덜 불안하니까. 그때 대답을 들었더라도 인생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꽤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꽤 좋은 대학이란 기실 별 쓸모 없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어떤 집단이나 조직을 싸그리 묶어서 하나의 단어로 정의하고 좋고 나쁨을 가리는 것은 쉽다. 겉에서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조직에도, 그 안엔 자부심을 갖고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이 조직에 계속 속하게 된다면 나는 훗날 어떤 생각을 가진 구성원이 될 지 궁금하다.
'햇살 따뜻한 날에 나랑 여행 갈래 다신 안 돌아오게 아주 먼 곳으로' 지난 봄날 한창 도서관에 다니며 공부할 때 곽진언 앨범이 나왔고, 아침에 도서관 출입문을 열 때 쯤이면 늘 이 노래를 듣고 있었다. '갈래, 제발 어디라도 데려가줘'라고 속으로 외치면서. 요즘 이 노래가 자꾸 생각나서 또 반복해서 듣고 있다. 고민하고 결정하는 걸 수없이 반복하고 불안해해야만 하는 삶을 누군가 그냥 햇살 따뜻한 날에 어디론가 데려가줬으면 좋겠다 싶기도 해서. 물론 누가 그렇게 해준다고 따라갈 사람은 절대 못되지만.
그리고 카페테리아에서 들은 기분 좋은 칭찬 몇 개. 난 첫인상이 매우 좋았고 싹싹해서 사람들이 좋아할 것이라고. 당시에 같이 스터디 할 때 나한테서 배운 점이 정말 많았다고.(면접 스터디에서 만난 사람이다) 난 나에게서 배울 점이 많았다는 말이 너무 좋다. 싹싹해서 사람들이 좋아할 거란 건 내가 그렇게 사회에서 가면을 잘 쓰고 다녔다는 말이겠지.
오늘도 통일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일기 끝. 내일도 무사한 하루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