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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망지 Oct 28. 2022

집에도 가끔은 생명이 있는 것 같지 않나요?

두시부터 다섯시간, 열다섯번째 편지

안녕하세요. 


갑자기 인생의 회전목마가 가속도가 붙으며 정신없이 머리를 굴리게 되었습니다. 돈 모으겠다는 목표로 인턴과 과외를 병행중인 와중에, 친구들 만나 노는 걸 너무 좋아해서 약속은 거절 않고 차곡차곡 챙기고 있거든요. 


그런 딸이다 보니 가족끼리 다같이 먹는 가끔의 저녁식사는 이야기 보따리가 터지다 못해 흘러 넘쳐요. 여기서 웃지못할 웃긴 사연은, 저희 동네가 방음이 심각하게 안 된다는 사실이죠. 저도 앞집 할머니 할아버지가 어느 빈도로 싸우는 지 다 파악하고 있을 정도니까요. 그런데, 저희 집엔 목소리 큰 여성이 2명이나 살고 있으니, 우리집 저녁식사는 거의 이 동네의 팟캐스트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요즘 우리 가족은 저녁을 먹을 때 꼭 창문을 먼저 닫곤 합니다. 그리곤 안심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거침없이 쏟아내죠. 


"앞으로 뭐할지"가 따끈따끈한 최신의 주요 주제입니다. 20대인 저 뿐만 아니라, 50대의 남녀 두분도 저마다의 미래를 두루뭉실 꾸며내고 있어요. 모두의 공통점은 어딘가에 얽매여 있지 않고 두둥실 살아나가고 싶다는 욕심이 있다는 거죠. 아버지의 경우는 올 10월말이면 지금 하고 계신 작업이 끝나서, 당분간 또 백수생활을 즐기실 예정이시고, 3개월 쉬었다가 새 프로젝트에 투입되신다네요. 백수생활 기간동안 저보고 집안의 소녀가장 역할을 해야한다고 부담주시길래, 냉큼 필요한 수영물품이랑 당장 먹고싶던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고 졸랐어요. 당장 다음달부턴 뭐 사달라고 조르기에 죄책감이 생길 테니까요. 어머니는 지금 하고 있는 약국 보조 일이 꽤 적성에 맞나봐요. 그래서 아버지랑 저는 어머니께 피트 시험 준비하라고 계속 부추기는 중입니다. 약대입학이요. 아직 인생 반절정도 남은 셈인데, 공부 한번 더 큼직하게 시도해보는 것도 꽤나 멋진 일이잖아요? 


그런데 엄마의 대답이 더 웃겨요. 

“난 놀고 싶어..” 


제가 엄마 딸이 맞네요. 노는 게 너무 좋습니다. 암튼, 이런 저런, 예컨대 눈이 침침해져서 글을 못 읽어 공부하기 힘들다는 등, 핑계를 대며 공부는 절대 안하실거라 하시네요. 그치만 열심히 꼬드겨볼거에요. 전 도전하는 우리 가족의 모습이 좋거든요. 옆에서 웃고있던 아버질 향해선, 영어공부 좀 하라고 닦달했어요. 아부지가 스스로의 결여된 영어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이유로 영어권 국가 여행은 극구 마다하고 계시거든요. 웃으면서 종로 파고다로 영어수업 끊어드릴까? 했더니. 옆에선 어머니가 그러면 학원 땡땡이 치고 옆에 있는 탑골공원 가서 실컷 약주하고 놀다 올 사람이라고 말하시더라고요. 저도 한술 더 떠서 “그러게, 이제 곧 탑골공원 입장 가능한 나이 될테니까. 휘젓고 다니시고 오겠네.” 라고 말했죠. 뭐 이런 식의 대화가 항상 반복되는 가족 저녁식사입니다. 왜 저희동네의 팟캐스트가 되었는지 알겠죠? 부디 이웃들이 그간의 대화들을 못 들었기를 바랍니다. 식사 때마다 이야기가 넘쳐나는 까닭은, 세 명뿐인 가족이지만 다들 각자의 이유로 바빠서 다함께 저녁을 먹는 게 좀 힘듭니다. 일단 저와 아부지가 좀 한 가닥하는 인싸라 늘 어딘가에 불려가네요. 이것을 이유로 엄마랑도 참 많이 싸웠죠….. 모쪼록 재미난 저녁식사대화가 더 생기면 편지에도 더 남겨보도록 할게요. 



화목엔 동네로 수영을 하러오고, 월수엔 과외가 있고, 사실 일부러 귀가를 재촉하고 동네에서의 시간을 누리도록 스스로를 설계한 것도 있긴 해요. 정확히는 제 집과 저 사이의 유기성을 공고히 하고 싶었달까요. 저는 가끔 뉘우쳐요. 집한테 너무 소홀하곤 하거든요. 일단 친구네서 자고 오는 걸 너무 좋아해서 외박이 잦은 편이고, 집을 비우는 일이 잦다보니 집 꼬라지가 가끔씩은 처참한 수준에 이르기도 해요. 주기적으로 집도 가꿔주고 이뻐해줘야 하는데 말이죠. 요즘은 주말마다 청소기 돌리고, 1주일간 어지럽혀진 옷 정리도 하고, 환기도 하고, 화장실도 정리하는 걸 습관처럼 만들고 있습니다. 외박이 잦지만 그래도 집에서 잘 때가 제일 편하고, 제 집의 자랑인 킹 사이즈 침대는 그 무엇보다 제게 위로가 되어주는 걸요. 구석구석 제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가득 찬 맥시멀리스트의 방은 또 얼마나 아늑한지. 그렇게 떠나있고 싶어하면서도 이렇게 저는 제 집을 애정하고 있긴 해요. 


집에도 가끔은 생명이 있는 것 같지 않나요? 제가 이렇게 집에 소홀히 임할때면, 마치 토라진 집이 제게 보복을 하듯이 물건들을 집 안에서 자주 잃어버리게 돼요. 그래서 제 핸드폰 메모장 상단 고정글은 언제나 “잃어버린 물건들” 입니다. 지금 목록은 가죽자켓, 검은색 롱 플리츠 스커트, 이북리더기. 세상에 이렇게나 많습니다. 집에 도깨비라도 있는 건지, 집 밖보다 안에서 잃어버리는게 더 잦고, 심지어 더 찾기 어려워요. 그래도 이렇게 메모장에 적어놓으면 까먹고 사는 사이에, 전부 제 손으로 돌아오곤 합니다. 


집에 생명이 있다는 판타지스러운 생각은 제가 유치원 때 본 영화에서부터 비롯되었어요. 이름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애니메이션이지만, 대충 “헌티드 하우스” “저주받은 집” 이런 뉘앙스의 제목이었던 것 같아요. 

7살 마포구에 위치한 유치원에 다닐 때였는데, 7살반 친구들 모두가 다같이 지하에 모여서 영화를 봤습니다. 아마 할로윈데이 부근으로 추측되어요. 그래서 무서운 영화를 (유치원생 시선에) 보여준 것 같아요. 대충 내용은 집이 살아있어서, 집을 함부로 대한 전 집주인들을 내쫒고 저주를 건 집이 잇는데, 어떤 꼬마 무리가 그 집에 들어가 모험을 하게되는…? 그런 내용이었어요. 뭐 사실 스토리가 인상 깊었다기보단 집을 생명이 있는 것으로 연출한 그 장면장면들이 기억에 남아요. 예를 들어 현관에 달려있던 집 안의 샹들리에는 그 집의 목젖인 셈이었고. 밖에서 보이는 2층의 양쪽 창문은 예상이 가듯 그 집의 두 눈인 셈이었죠. 현관문이 열리면 바닥에 깔려있던 빨간색 카펫은 그 집의 혓바닥이 되었어요. 그 꼬마 무리를 잡아 끌기 위해 카펫이, 아니 그 혓바닥이 이리저리 움직이던 장면들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그런 기발하고, 조금은 기괴하고 귀여운 상상력과 연출 장면들이 조각조각 뇌에 남아 기억이 납니다. 이런 무의식 때문에 저도 의무감과 죄책감과 그리고 약간의 공포를 가지고 집을 가꾸고 있는 것 같아요. 제 집이 저를 내쫒고 매우 혼내도 제가 할 말이 없을 지경이거든요.


오늘은 퇴근하고 곧바로 과외수업까지 있는, 조금은 힘든 요일입니다. 돌아가면 여직 어질러 놓은 옷부터 치우고, 집 노트북으로 해야할 일들을 차츰차츰 해나가야겠어요. 일찍 마무리가 되면, 넷플릭스를 조금 봐야겠습니다. 달달한 밤이 절 기다리네요. 


오늘은 조금 서둘러 편지를 남깁니다. 

할 일이 태산이어도, 야금야금 해가는 맛이 있습니다. 다들 한 입씩 오늘의 할일을 씹어 삼키세요~ 


위로와 사랑을 여기에 두고,

2022년 9월 28일 PM 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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