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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항쟁

<소년이 온다> 후기4

by 아마토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YH무역 노동자들의 신민당점거농성 강제해산 후 김영삼 총재는 미국 뉴욕타임즈와의 기자회견에서 박정의 정권을 비판하며 미국의 개입을 요청한다. 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은 김영삼의 이 발언을 사대주의로 규정하며 김영삼을 국회의원직에서 제명 처리한다. 그리고 이 일로 부산과 마산에서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시위가 벌어진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다"

부마항쟁 대응방식으로 권력 실세였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간 갈등이 극에 달한다. 차지철은 캄보디아를 예로 들며 계엄령을 선포해 탱크로 밀어버리자는 경경파였다. 김재규는 부마항쟁 대다수는 학생, 시민들이라며 야당과 대화로 해결하자는 온건한 입장이었다. 박정희는 차지철의 의견을 수용했다.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그러나 김재규는 전부터 박정희 암살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고 실행에 옮긴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궁정동 연회장. 김재규는 박정희와 차지철에게 총격을 가해 사살한다. 그리고 같이 연회장 인근 정보부장 사무실에 있던에 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대통령의 사망을 발표한다. 이 때까지만 해도 그의 계획은 성공하는 듯했다. 하지만 당시 연회장에 있던 또다른 인물 김계원 대통령비서실장이 정승화에게 사실을 말하고 이로 인해 김재규는 체포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0년 5월 24일 사형된다.


완성되지 못한 서울의 봄

박정희 사망으로 유신체제가 붕괴됐다. 그러면 민주주의 시대가 온 걸까? 알다시피 그러지 못했다. 박정희는 생전 의도적으로 구(舊)군부를 의식해 신군부를 키웠다. 신군부(하나회)의 수장이 전두환이었는데 12월 12일 군사반란을 일으키면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한다(김재규와 공범이라는 명분). 이로 인해 1980년 5월 15일. 10만명의 대학생들이 서울역에서 집회를 열어 '계엄 철폐'를 외치며 민주화를 요구한다. 민주주의로 나갈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하지만 쿠데타의 명분을 줘서는 안된다는 의견으로 기울면서 집회 자진 해산 결정이 이뤄진다. 학생들은 헤어지면서 다짐한다. 혹시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지면 교문 앞에서 모이자고 말이다. 예상대로 전두환은 5·17 쿠데타를 감행하고 권력을 차지한다. 그러나 학생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오직 전남대학교 학생들만이 정문을 지킨다. 5.18 광주민중항쟁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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