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후기3 - YH무역노동조합
1960년대. 한국은 외국에서 빌린 돈을 갚기 위해 머리카락(가발)을 대표 수출 품목으로 선택한다. 당시 미국은 중국에서 만들어진 가발을 수입 금지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한국이 반사이익을 얻었다(실제로 박정희 정권 초에 가발이 최고 수출 산업이었다).
대표적인 가발수출업체로 YH무역이 있다. 1966년 10여명의 노동자로 출발한 몇 년 뒤 4천명의 노동자를 둔 업체로 성장한다. 수출규모는 1000만달러에 일러 회사 대표 장용호는 공로를 인정받아 철탑산업훈장을 받는다. 당시 고액 개인소득자 10위권에도 든다. 그런데 규모만 키울 줄 알았지 노동자들에 대한 처우는 매우 열악했다. 하루 12시간 일해도 임금은 낮았고 그 임금도 최저임금보다 낮았다. 언제나 일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기에 기숙사에서 지내던 시절이었다. 상여금도 받지 못했다. 이들은 한국노총 섬유노조의 도움으로 1975년 5월 노동조합을 설립한다(동일방직을 탄압했던 섬유노조 김영태 위원장 전).
섬유노조 YH무역지부는 회사측과 단체교섭을 해 임금인상을 비롯하여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시작한다.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상황은 달라지는데 정부가 경공업에서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고, 인건비가 상승하면서 가발경기가 쇠퇴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회사 대표 장용호가 자금을 미국으로 옮기고 문어발 사업확장으로 경영위기가 닥친다(1978년 노동자 수가 500명으로 감소한다). YH무역은 결국 기습적으로 폐업을 신청한다.
"나가라면 어디로 가란 말이냐. 배고파 못살겠다. 먹을 것을 달라"
180여명의 YH무역노조 조합원들은 물러설 곳이 없었다. 철야농성을 했고, 종교단체에 지원을 요청한다. 그리고 김영삼 총재가 있는 서울 마포구 신민당사에서 점거투쟁에 돌입한다. 김영삼 총재는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신민당사를 찾아준 걸 눈물겹게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며 노동자들을 격려했다.
이때가 1979년 8월 9일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동일방직 노조를 작심하고 짓밟아 버린지 1년. YH무역노조 역시 그대로 놔둘리 없었다. 신민당사를 점거한 지 3일만에 경찰이 강제해산을 한다. 걸린 시간은 20여 분. 긴 시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진압 과정에서 노동자 김경숙이 사망한다. 경찰은 그의 사인을 자살이라고 해명한다(훗날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자살은 조작됐다고 발표한다).
당시만해도 몰랐을 거다. 이 YH무역 강제해산이 유신체제, 박정희 정권의 몰락을 가져올 거란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