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970년대 노동운동

<소년이 온다> 후기2

by 아마토

"존경하시는 대통령 각하, 옥체 안녕하시옵니까? 저는 제품(의류) 계통에 종사하는 재단사입니다. (중략)

종업원의 90% 이상이 평균 연령 18세의 여성입니다. 기준법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으로써 어떻게 여자에게 하루 15시간의 작업을 강요합니까? 미싱사의 노동이라면 모든 노동 중에서 제일 힘든(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노동으로 여성들은 견뎌내지 못합니다.

또한 2만여 명 중 40%를 차지하는 시다공들은 평균연령 15세의 어린이들로써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장기에 있는 이들은 회복할 수 없는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타격인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전부가 다 영세민의 자녀들로써 굶주림과 어려운 현실을 이기려고 하루에 90원 내지 100원의 급료를 받으며 하루 16시간의 작업을 합니다. 사회는 이 착하고 깨끗한 동심에게 너무나 모질고 메마른 면만을 보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각하께 간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전태일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쓴 편지 중


1970년 11월 13일,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 봉제공장 재단사로 일하던 22살 전태일이 구호를 외치며 분신 항거했다. 전태일의 분신은 대한민국 민주노조 운동의 출발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이를 가만히 눈 뜨고 지켜볼 수 없었다. 바로 중앙정보부와 노동부 관계자들을 전태일의 어머니에게 보내 많은 돈을 보여준다. 노동조합을 만들지 못하게 회유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소선 여사는 그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어려운 길을 택한다. 1970년 11월 27일 평화시장 노동자들과 함께 청계피복노동조합을 결성한다. 주40시간 근로, 주휴일, 노동조합 설립의 투쟁을 전개했다. 이로 인해 당시 열악한 환경에서 일했던 여성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대중적인 노동운동이 시작된다.

대표적으로 여기선 인천 만석동에 있는 면방업체인 동일방직과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 있었던 가발회사인 YH무역에서 있었던 노동운동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우선 동일방직.

동일방직은 실을 뽑아 원단(천)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1971년 당시에만 수출 5백만 달러를 달성한 대기업이었다. 노동조합과 관련하여 한국노총 자료를 찾아보면 1972년 당시 전국섬유노조 동일방직지부 조합원이 1383명으로 나오고 그 중 여성은 1204명이었다. 여성이 참 많다(87%). 당시 여성들은 산업역군이었다. 1960~70년대 한국은 저임금으로 여성들이 일하던 경공업 중심의 수출 국가였다. 그리고 집에 생활비를 보내주고 동생들의 학비를 마련해 주던 여성들이었다. 그런데 동일방직의 노동환경은 열악했다. 오늘날 고용노동부의 폭염 가이드라인을 보면 체감온다가 35도 이상이면 매시간 15분 휴식이 권장되는데 당시 동일방직의 공장 안은 40도를 넘나들었다. 탈수증으로 쓰러지는 사람이 많아 소금이 비치돼 있었다. 솜먼지가 폐에 쌓여 병원에 가도 산재 처리를 받지 못했다. 삶이 어려워 유흥가로 들어간 노동자도 있었다고 한다.

1972년 5월. 참다 못한 동일방직 노동자들은 단결해 당시 어용노조를 바꾸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회사를 상대로 교섭해 공장 내 환풍기 설치, 임금 조건, 생리휴가 등 개선을 이뤄낸다. 노동조합의 기본 역할이자 존재 이유였다.


회사 측은 노동조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1976년 7월. 남성들을 매수해 불법적으로 대의원대회를 개최한다. 노조 집행부를 회사에 맞는 사람들로 교체하려는 시도였다. 불법 행위를 두고 볼 수 없는 여성노동자들은 파업으로 대응한다. 파업 3일차. 경찰이 농성장에 들어와 강제 연행을 시도한다. 한 여성이 큰 소리로 말한다.


"옷을 벗어. 우리 다 같이 옷을 벗자."


옷을 벗으면 몸에 손대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모두가 옷을 벗었다. 경찰은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당황했다. 주모자만 연행하겠다고 말하지만 노동자들은 우리 모두가 주모자라며 대응했다. 결국 노동자들은 동일방직노동조합을 지켜내는데 성공한다.


나체시위 후, 이를 매우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 한명이 박정희 대통령. 바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가 관여한다. 그것도 경기지부가 아니라 서울본부가 직접. 동일방직 경영진이 함께하고. 특히나 노동자들 편에 서야 하는 섬유노조 김영태 위원장도 함께해 동일방직노조 와해 작전을 추진한다. 그리고 1978년 2월 21일 새벽. 대의원대회 준비를 하던 동일방직 노조 사무실에 남성들이 쳐들어와 여기저기에 똥물을 뿌리기 시작한다. 사무실에 있던 여성노동자들에게도 뿌린다. 상의를 벌려 가슴에 똥을 집어 넣고 입을 벌려 똥을 쑤셔 넣었다. 당시에도 상상할 수 없던 만행이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가 철저히 짓밟히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공권력의 도움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민중의 지팡이었던 경찰은 똥물의 현장에서 그저 구경만하고 있었다. 도움받을 곳이 없었다. 그래도 이대로 지나갈 순 없었다. 적어도 이 순간 만큼은 잊지 않고 기록해야 했다. 노동자들은 공장 인근 사진관 주인을 데려 온다. 그리고 생생한 장면을 사진으로 찍었다. 중앙정보부와 경찰은 이 사진이 남겨지길 바라지 않았다. 사진관 주인을 찾아가 필름을 내놓으라고 협박한다. 사진관 주인 이기복씨는 기지를 발휘했다. 필름은 이미 여성노동자들이 가져갔다고 말이다. 그렇게 위기를 벗어난 사진은 노동탄압의 증거로 세상에 공개된다. 동일방직노조는 그 해 3월 10일 근로자의 날 현장에서 "똥을 먹고 살 수 없다" "동일방직 사건 해결하라"라고 외치며 전국에 이를 알린다. 3월 26일에는 서울 여의도 부활절 예배 때 단상에 올라 "노동3권 보장하라!"라고 소리쳤다.


섬유노조 위원장 김영태. 그는 보통이 아니었다. 1978년 4월 1일 동일방직에서 노동자 124명을 해고하자 이들의 명단을 전국 섬유 사업장에 전달해 재취업을 시키지 말라고 앞장섰다. 최초의 취업 금지 블랙리스트였다. 동일방직노조는 그렇게 외로운 투쟁을 했었다. '소년이 온다'의 임선주는 바로 이 동일방직노조 조합원이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소년이 온다> 5장 - 임선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