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쳇 GPT접근금지] 나의 성장통
[1]
나는 당구 400이다. 재수하면서 당구에 빠져 당구장에서 살았다. 학원에 등록만 해놓고 당구장으로 출근했다. 당구장에서 매일매일 문 닫을 때까지 당구를 쳤다. 돈도 엄청 많이 들어갔다. 나중에는 학원 등록도 안 하고 그 돈으로 당구만 쳤다. 완전 당구에 미친놈이었다. 당구장 공사하는 날에는 당구장에 가서 하루 종일 도와주었다. 완전 또라이였다. 일분일초가 아쉬운 놈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당구에만 빠져 살았다. 학력고사를 며칠 앞두고 깡쏘주를 요구르트병에 따라 엄청 퍼 마신 후 당구 친 걸 후회하며 펑펑 울었다. 이제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나는 본고사가 폐지되고 첫 학력고사 세대였다. 본고사가 폐지된 걸 핑계 삼아 당구만 쳐댄 것이다. 드디어 학력고사날이 되었다. 두 번째 시간에 수학시험을 봤는데 풀리는 게 하나도 없었다. 땀만 삐질삐질 흘렸다. 시험을 다 보고 반포중학교 운동장을 걸어 나오는데 너무 허탈했다. 내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하니 무섭기도 했다. 이제 군대를 가야 하는구나! 독서실에서 주섬주섬 짐을 싸가지고 시골집에 내려와서 기죽고 하루하루 숨죽이며 버텼다. 학력고사를 끝내고도 서울 독서실에 살면서 당구를 치고 싶었지만 명분이 없었다.
우리 집은 못살았다. 더군다나 그해 여름에 비가 거의 함탱이로 쏟아붓는 것 같이 와서 고추밭 전체가 자갈밭으로 변해있었다. 어머니는 몸져누우셨다. 시골로 내려와서 공부하라는 어머니 말을 거역했다. 학력고사가 몇 달 안 남았는데 학원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며 고집을 부렸다. 사실은 당구를 치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완전 나쁜 새끼다. 집안은 망해가는데 부모님이 빚내서 준 돈으로 당구만 친 것이다. 또라이도 이런 또라이는 없을 것이다.
[2]
학력고사 점수 발표날이 다가왔다. 서울 반포중학교에서 했다. 오전 10시. 사람들 틈을 비집고 쳐다본 내 점수는 320점 만점에 283점이었다. 와 대박! 연고대 상위권 합격점수다. 그런데 순간 가운데 8자가 3자로 보이는 것이 아닌가? 233점! 순간 머리가 깜깜해졌다. 어디를 가야지? 서강대? 한양대? 그래도 당구 치며 논 인생치고 233점이면 괜찮은 편이라고 스스로 위안하고 돌아서면서 다시 한번 내 점수를 확인했다. 헛개 보였다. 순간 쓰러질 뻔했다. 233점이 아니었다. 213점이었다. 절망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죄를 받는구나!
운동장에서 나누어주는 성적표를 받고 시골집으로 조심조심 내려왔다. 안방으로 들어가니 아버지가 대야에 발을 담그고 씻고 계셨다. '몇 점 나왔냐?' '213점입니다' '뭐?' 그리고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깬 건 나의 변명이었다. '충북대 사대는 갈 수 있을 겁니다' 아버지는 한숨을 내 쉬었다.
[3]
나는 지금 고등과 선생이다. 지금은 책도 출판한 어엿한 선생이지만 옛날에는 공부를 찌질히도 못했다. 공부를 못한 건 핑계 같지만 환경 때문이었다. 시골에서 한 시간에 한 대씩 있는 버스를 타고 통학했는데 결행도 자주 해서 걸핏하면 지각을 했다. 한 시간 지각을 하면 벌로 작업을 한 시간 했다. 수업 두세 시간 빼먹는 건 다반사였다. 중3 때 우열반 편성을 했는데 우수반에서 탈락했다. 당시 우수반 아이들은 방과 후에 따로 남겨서 밤 12시까지 공부를 시켰는데 우리 열등반 아이들은 네시면 끝났다. 우수반 아이들을 엄청 부러워하면서 하교하곤 했다. 열등반인 우리 반 교실은 항상 난장판이었다. 싸움에 폭력에 문제투성이반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공부를 해나갔다. 비록 열등반이지만 반에서 1등을 유지했다. 그렇게 중학교 학창 시절은 흘러가고 있었다.
[4]
나는 고등학교를 도시로 가고 싶었다. 당시 청주는 비평준화였다. 내 점수로 청주고는 힘들었고 충북고는 가능했다. 그런데 담임은 청석고를 쓰라고 했다. 나는 충북고가 아니면 쓰기 싫었다. 못 사는 우리 부모님은 그냥 괴산고로 가기를 원하는 눈치였다. 근데 그 당시 우리 반에 이기호라는 놈이 있었다. 1년 내내 나를 괴롭힌 놈이었다. 뻰찌로 내 손가락을 찝는 학폭을 행사한 나쁜 새끼다. 그런데 이 자식이 내가 청주로 원서 쓰는 것을 막았다. 너 청주로 원서 쓰면 죽여버린다고 했다. 정작 저는 청주 운호고로 원서를 쓰면서 나한테는 니가 만약 청주로 나오면 3년 내내 괴롭힐 거라고 했다. 순진한 나는 기호의 엄포에 굴복했다. 그냥 괴산고등학교로 원서를 쓰기로 결정했다. 부모님이 괴산고 진학을 원하신다는 핑계를 대면서, 담임이 청고나 충북고 원서를 써주지 않는다는 핑계를 대면서 나는 괴산고로 원서를 썼다. 괴산고엔 당연히 합격했지만 문제가 또 터졌다.
[5]
괴산고엔 당연히 합격했다. 그런데 부모님이 등록금 내는 날을 그냥 스쳐버린 것이었다. 천천히 내도 되겠지 한 것이다. 나는 괴산고마저 떨어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2월에 괴산고 추가모집이 있었다. 추가모집에 합격했다. 괴산고로 가게 되었는데 반편성이 이상했다. 추가합격한 애들을 6반으로 몰아넣고 교실도 없었다. 10명씩 짤라서 1반부터 5반까지 집어넣었다. 우리는 스스로 이스라엘 반이라고 불렀다. 집 없는 설움보다 더한 교실 없는 설움. 일주일에 한 번씩 우리는 과학실 모퉁이에서 담임과 조우했다. 종례시간이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서로를 이스라엘 반이라며 히죽거리며 애써 아픔을 감추었다. 그렇게 고등학교 1학년은 흘러가고 있었다.
[6]
2학년이 되어 반편성을 우열반으로 편성했는데 나는 그렇게도 원하던 우수반에 배정되었다. 이제 원 없이 공부만 해보고 싶었다. 분위기 좋은 교실에서 진짜로 열심히 공부하고 싶었다. 그런데 문제가 터졌다. 우열반을 해체하라는 교육부 지침이 떨어졌다. 그렇게 3월 중순쯤 새롭게 반편성이 되었다. 막 섞어서 반을 편성하니 학폭맨들이 우리 반에 왕창 들어왔다. 나는 키도 작아 5번이었는데 완전 기죽어 지냈다. 그렇게 끄적끄적 고등학교 2, 3학년이 지나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해 충북대에 떨어졌다. 고난의 시절이 시작된 것이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