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로 읽는 대한민국 교육여정(2)

배움의 나래를 펴지 못해 서러웠던 우리 선조들

by 김재훈

해방 이후 우리 국민들의 교육적 열망은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만큼 일제강점기 때 우리 민족은 교육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었다. 특히 중등학교 교육은 일본인들이 독차지하고 우리는 보통학교만 다닐 수 있었거나 그마저도 제한되었다. 조선인을 하급노동자로만 키우려고 하는 일제의 숨은 계략이다. 오늘은 일제 강점기 우리 국민들의 교육적 열망이 어떻게 탄압되어 왔는지를 살펴본다.

일제의 서당 탄압 이야기부터 해본다. 일제는 처음부터 서당을 탄압하진 않았다. 보통학교를 만들면 서당은 자연스럽게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또한 서당이 무슨 큰 교육적 역할을 하겠거니 한 것이다. 그런데 서당이 계속 늘어나자 일제는 1918년 '서당에 관한 규칙'을 만들어서 서당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조선에는 서당이 2만 4천 개에 달했고 학생수가 27만 5천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또한 독립운동가들이 서당을 만들어 민족교육을 시켰던 곳이기도 했기 때문에 일제는 더욱더 서당 탄압에 열을 올리게 된 것이다.

일제는 강점기 동안 세 방향으로 교육 정책을 실시한다. 바로 우리 민족문화를 말살하는 정책 그리고 그네들 문화에 동화시키는 정책 또 우리 국민들을 우민화시키는 정책을 병행 실시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정책의 기조하에 일제는 1911년 사립학교령을 다시 공포해 민족주의적 경향이 짙었던 수많은 사립학교를 탄압하고 공립학교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교육정책의 틀을 잡는다. 이때 공포된 사립학교령은 사립학교의 인가조건을 강화하고 그 조건을 소급적용해 기존의 학교들도 재인가를 받도록 해서 이로 인해 수많은 사립학교의 인가가 취소된 것이다.

1910년에 한일 합병이 되었지만 사실, 그 이전부터 일제는 사립학교령을 통하여 조선의 교육을 통제해 왔다. 아마 일제 강점기 우리 국민들은 교육을 받지 못해 서러웠을 것이다. 자료를 보면 1919년 당시 조선인의 인구가 1700만 명,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33만 명인데 학교를 비교해 보면 조선인을 위한 보통학교가 484개, 일본인을 위한 소학교가 393개로 인구대비 일본인 학교가 훨씬 많다. 더욱이 중등학교로 가면 아예 한국학생수는 거의 없고 일본학생 판이다. 한마디로 조선인과 일본인에 대한 교육기회와 교육시설에 대한 차별이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일제는 중등교육도 그랬지만 고등교육은 기회 자체를 조선인들에게는 주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소위 무단정치의 시기는 1919년까지 이어지다가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일제는 크게 당황하여 유화정책을 펴게 되는데, 이때 발표된 것이 1922년 개정조선교육령이다. 이것을 통하여 기존에 일본인 학교인 소학교와 조선인을 위한 학교인 보통학교의 수업연한을 외형상으로는 같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대학교육을 인정하여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근대식 대학교육이 시작되게 되는데 이때 설립된 대학이 서울대학교 전신인 경성제국대학이다.

그런데 사실 경성제국대학은 우리 국민들의 조선민립대학 설립운동을 무마하기 위한 일제의 잔머리였다. 당시 이상재와 조만식에 의해서 민족대학설립을 위한 1000만 원 모금운동이 일어났다. 비록 1923년 대홍수와 1924년 극심한 가뭄 등으로 실패하였지만 일제는 이러한 운동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이를 봉쇄하기 위한 일환으로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한 것이다. 그러나 경성제국대학이 세워졌다고는 하나 조선인은 극소수만 다닐 수 있었을 뿐 일본인의 전유물이었다. 학과 개설도 사상이나 이념을 다루는 문과 쪽은 지양하고 공과나 의예과가 개설되었다.

이러한 문화통치의 시기를 1919년부터 1937년까지로 보는데 일제는 이 시기에 겉으로는 유화정책을 펴는 것 같았지만 유화 제스처를 펴면서 내부적으로는 친일파를 양성해 가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화통치의 시기도 일제의 전쟁 광분으로 막을 내리고 그야말로 1938년부터는 민족 말살기 황민화 교육으로 우리에겐 절망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일제는 1931년 만주침략에 이어 1937년 중국본토 침략 그리고 1941년에는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전쟁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이제 한반도는 그들의 전쟁을 위한 물자와 인력 조달의 기능으로 생각하여 급격한 황국신민화 정책을 추진하게 되고 교육을 그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이때 발표된 것이 제3차 조선교육령이다. 이때부터는 소위 '내선일체'라고 하는 정책이 실시된다. 말이 내선일체이지 일본은 내(內)지 조선은 외(外)지로, 일본인은 일등국민으로 조선인은 이등국민으로 만드는 꿍꿍이이다. 내선일체와 자매품이 황국신민이다.


천왕에게 충성하기 위해 신사참배 의무, 창씨개명 강요, 전쟁물자 수탈, 조선어 말살 정책, 강제징용, 위안부 동원 등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부터 연합군에 항복을 할 때까지 일제는 마지막 발악을 하게 되고 그 피해는 오롯이 한반도에 사는 우리 민족에게 지워졌다. 교육도 완전히 전쟁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학교에서는 조선어 말살정책으로 국어상용패라는 것도 등장했다. 아침에 등교하면 당번에게 교사가 이 패를 준다. 그러면 당번은 이 패를 들고 있다가 우리말을 하는 아이에게 패를 건네준다. 그렇게 돌고 돌다가 마지막 하교 시에 이 패를 들고 있는 학생은 교무실로 불려 가 엄한 꾸중을 듣는, 우리말 말살 정책이었다.


국어상용패 정도는 일도 아니다. 이제 학교는 전쟁을 위한 수단이어야 했다. 계속되는 전쟁을 위한 교육의 일환으로 그해 10월에는 교육에 관한 전시 비상조치령을 내려 전문학교 이상의 고등교육기관을 전시에 대비한 체제로 개편하도록 하였고, 1944년 4월에 '학도동원 체제정비에 관한 훈령'과 '학도동원 본부의 설치' 1944년 10월에 '학도 근로령' 1945년 3월에 '결전교육조치요강' 1945년 5월에 '전기교육령'을 발표하여 학교교육을 전쟁의 도구로 삼았다. 이 당시 수많은 지식인이나 저명인사들이 일제의 회유와 설득 그리고 강압에 의해 젊은 학생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글이나 연설을 하여 찬란한(?) 친일 행적을 기록하게 된다. 그만큼 해방 직전 우리 민족에겐 희망은 없고 절망만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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