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미군정 시기의 좌충우돌 교육개혁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한국사회는 '무주공산'이 되었다. 이러한 치안 부재의 상황에서 국민들은 서로를 다독이면서 질서유지에 안간힘을 쏟았다. 당시의 모습을 보면 건국준비위원회 산하단체로 건국 치안대를 조직하고, 또 중등학교 이상 학생들로 학도 치안대를 조직하여 일익을 담당하기로 하는 등 사회질서 유지에 앞장서는 모습이 많았다. 지도층들은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어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8월 24일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집행위원회가 열렸다. 8월 29일에는 치안유지에만 협력하자는 조선학도 총궐기대회도 열렸다. 이런 상황에서 9월 1일 오후 1시 경성 상공에 미군 B24기 한대가 날아와 '경거망동하지 마라'라는 전단을 뿌리고 일본으로 날아갔다. 남한을 지네들이 곧 접수하겠단 통보다. 이런이런.
일본과 연합국이 맺은 항복문서 일반명령 제1호에는 북한은 소련군 남한은 미군이 진주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다. 미군은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점령군 행세를 했다. 건국준비위원회나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모두 인정하지 않았다. 9월 2일 하지 중장은 조선 민중에게 고하는 포고를 발표하였다. 연합사령관 포고 위반자는 처벌한다는 요지의 포고였다. 이 당시 미군은 한국의 사정을 잘 몰랐기 때문에 일단 일제 말기에 행세하던 관료들을 그대로 미군정 행정에 투입하게 된다 그야말로 친일파들이 그대로 중용된 거다. 이런이런. 9월 9일 하지는 이미 확정된 항복조건을 이행함에는 현존 통치기구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는 요지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교육 부문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유학생 출신으로서 반공 이념이 투철하고 민주주의적 성향을 지닌 교육인사들을 대거 발탁하여 교육정책을 만들도록 하였다.
미군정의 교육정책은 조선교육심의위원회를 꾸려 시행해 나갔다. 이 위원회에는 총 100명의 교육인사가 참여하여 10개 분과로 나누어 교육정책을 만들어 나갔다. 10개의 분과위원회는 교육이념, 교육제도, 교육행정, 초등교육, 중등교육, 직업교육, 사범교육, 고등교육, 교과서, 의학교육 등이다. 조선교육심의워원회를 꾸릴 때부터 주도적으로 활동했던 조선 측 교육인사로는 미군이 한국에 들어오기 직전인 8월 27일 서울 천연동에서 모임을 가졌던 교육인사 핵심 5인방을 들 수 있다. 오천석, 김활란, 김성수, 유억겸, 백낙청 등이다. 이들은 미군정 교육정책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한국의 초기 교육정책의 기틀을 다져나가게 된다.
이때 생겨난 교육이념이 홍익인간이다. 미군정의 교육자문기구인 조선교육심의위원회는 일제 강점에서 해방된 조선의 교육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교육이념의 제정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민주국가의 공민을 기르기 위한 토대로 홍익인간을 제시한 것이다. 미군정이 제시하는 민주주의와 우리가 가진 민족주의 이념의 조화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때 만들어진 학제가 오늘날까지 이어져오는 '6334' 단선형 학제이다. 당시에도 찬반논의가 거셌지만 미군정의 압력으로 단선형 학제를 채택한 것이다. 유럽식의 복선형 학제를 버리고 미국식의 단선형 학제를 따른 것이다. 또한 일제 강점기의 학제가 복선형이었기 때문에 이를 철폐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의미에서 단선형 학제를 택한 것이다.
미군정 시기는 우리 국민들의 잠재된 교육열이 폭발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억압되어 왔던 교육에 대한 욕구가 분출된 시기이다. 우리 대한민국의 국민학교 취학률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상승해 왔다. 미군정은 우리 국민의 높은 교육열과 남한에서 민주주의 이념을 조속히 정착시켜야 한다는 정책적 측면을 고려하여 국민학교 의무교육을 시행할 것을 결정하게 된다. 1946년 9월 국민학교 의무교육 실시가 결정되었다. 국민학교 학생수는 빠른 속도로 늘어나 미군정 말기에는 75%의 아동들이 국민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가공할 속도이다. 그러나 미군정은 재정상의 이유를 들면서 학교시설에 대한 투자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학교들은 2부제를 넘어 3부제 4부제 수업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미군정 시기에 일어난 교육으로 '새 교육 운동'이 있다. 그 배경에는 당시에 미국에서 유행하던 교육철학 사조가 존 듀이가 주창한 진보주의 교육운동으로써 아동중심주의 교육이 있다. 이것이 미군정 시기 새 교육 운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 새 교육 운동은 전통적 일제교육의 잔재를 씻어내고자 하는 노력으로 새로운 교육이라는 의미에서 새 교육 운동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의 교육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토론식의 새 교육은 학부모들 사이에서 새 교육을 하면 실력이 떨어진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새 교육 운동은 학부모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에는 종전의 방식으로 회귀하게 된다.
새 교육 운동도 실패하고 국민학교 의무교육 정책도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야기했다. 갑자기 늘어난 학교 졸업생과 직업 시장과의 미스매칭이 일어나면서 취업난이 심각해지자 학생들은 너도나도 상급학교로 진학하려고 하였다. 이에 따라 학력인플레가 나타났으며 이러한 학력가수요 현상은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교육문제로 자리 잡아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또한 중학교로 진학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새 교육 운동은 점점 더 설자리를 잃게 되었다. 당시 토론식 수업이 권장되었지만 아이들을 마주 보게 앉혀 놓고는 강의식으로 수업을 하곤 하였다. 강의식 수업이 중학교 입시에서 유리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새 교육 운동은 좌초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