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가 학교를망치고 있을까? 학교가사회를 망치고 있을까?
1. 나의 노력이 남의 불행으로 인정받는 사회
‘인천국제공항 정규직 전환’사건(이하 인국공 사태) 라고 불리는 사건이 있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선거 공약을 통해 “상시·지속적 업무 및 생명·안전 관련 업무는 정규직으로 직접 고용”하겠다 약속하였다 문재인 대통령의 인천국제공항 방문 이후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계획이 발표되었고 이는 많은 사람의 찬반 논쟁을 불러왔다.
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비정규직 상담사들이 2021년 공단의 직접 고용을 요구하며 파업에 나선 지 8개월 만에 정규직화되었다. 이 과정에서도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컸으며 그 중 상당수는 현 정규직 노동자들이었다.
한국사회가 이른바 ‘공정’이라는 단어에 갇혀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종합하면 초·중·고 12년 경쟁의 승리를 통해 이른바 ‘좋은 대학’을 나오고 그 안에서의 경쟁을 뚫고 ‘정규직’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건만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그저 운이 좋거나, 집단 파업을 통해 ‘정규직’을 훔쳐가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이런 불공정한 방식으로 나와 같은 지위를 누리는 것은 나의 노력이 부정당하는 것이고 그렇게 부정당하기엔 나의 노력이 너무 억울하다라고 읽힌다. 언론과 정치권의 이해에 따라 부풀려지고 이용당한 면이 있겠지만 그 내면에 흐르는 정서에 ‘억울함’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억울한 감정은 비정규직의 처우가 부당하고 착취적이며 불합리한 상황에 놓여있음을 이야기해봐야 큰 울림으로 다가가지 않는다. 비정규직이 부당한 처지에 놓여있는 것은 그들이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공정이라는 가치의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정서는 일부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세계가치관 조사 7차 자료(2017~2020) 중 ‘소득이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노력 등에 따라) 더 차이가 나야 한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한국인의 64.8%가 불평등에 찬성하는 결과가 나왔으며 이는 한국을 포함한 조사대상 6개국 중 압도적으로 높은 수치일 뿐만 아니라 조사 때마다 그 수치가 늘어가고 있다.
2. 교실이데아
매일 아침 일곱시 삼십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릿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
막힌 꽉 막힌 사방이 막힌
널 그리고 우릴 덥석 모두를 먹어삼킨
이 시커먼 교실에서만
내 젊음을 보내기는 너무 아까워
좀 더 비싼 너로 만들어 주겠어
네 옆에 앉아있는 그 애보다 더
하나씩 머리를 밟고 올라서도록 해
좀 더 잘난 네가 될 수가 있어
서태지가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라고 노래한 것이 1994년이다. 이 노래를 들으며 교실에 ‘갇혀’있던 청소년들은 이제 학부모가 되었다. 2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900만이던 학생 수가 600만으로 줄어든 것 말고는 크게 달라진 것이 보이지 않는다.
학교는 여전히 경쟁을 기반으로 공포를 자극해 배움을 유도하고 있다. 공포에 기반을 둔 교육은 학교의 경쟁에서 패배하는 순간 삶에서 낙오하게 된다는 공포는 치열한 경쟁을 불러오고 그 과정의 결과는 열등감에 사로잡힌, 인생을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를 내면화한 무기력한 다수와 승자독식이 당연한 원칙이라 생각하며 세상에 냉소적인 오만한 소수만 남기게 된다.
이 둘의 공통점은 사회가, 세상이 나에게 해준 것이 없다고 느낀다는 점이다. 패자는 세상이 나를 내버려 뒀고, 돌보지 않았으며 알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더 노력할 충분한 기회를 얻지 못했고 그래서 내가 더 좋은 대학 더 좋은 과 더 좋은 직장을 얻지 못했다고 느끼고, 승자는 내가 똑똑하고, 나 혼자 노력했고, 스스로 어려움을 극복했기 때문에 승리했다고 생각한다. 이 과정에 공동체는 없다. 사회가 나의 성취 배움에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기에 난 세상에 진 빚이 없다고 생각한다. 목숨 걸고 콜로세움에서 싸운 검투사는 승자나 패자 모두 지금의 현실에 감사하지 않는다. 단지 내 능력에 따라 살거나 죽을 뿐이다.
3. 2022년 학교는?
2022년 대한민국에서 중·고등학생 장래희망 1위는 교사이다. 30년 전만 해도 이렇게까지 선호하는 직업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97년 금융위기 이후 직업의 안정성이 가장 중요한 직업선택의 조건이 되면서 교직의 인기는 급하게 상승하였다. 이는 임용고시의 경쟁률을 가파르게 올렸고 해가 거듭될수록 이런 현상은 심화 되었다. 임용고시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더 높은 점수를 받는 사람들이 교사가 되었고 이는 교사의 질(?)을 높였다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다. 하지만 관점을 조금 달리하면 교직은 스스로의 피나는 노력으로 얻은 타이틀이 되었고 이렇게 얻은 타이틀은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나만의 권리가 되었다. 내가 교사가 되는 데에 이 세상이 준 도움은 없다. 나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기만 한다면 그 이상의 노력이나 헌신을 요구할 수 없다. 이런 생각이 금요일 오후가 되면 텅 빈 교무실을 만들고 업무분장 시즌이면 잠깐의 민망함을 견디면 1년이 편하다는 신조로, 하나라도 업무를 줄이기 위한 신경전을 벌이기도 하는 교사들을 만들기도 하였다.
학교 안에도 다양한 직군의 사람들이 일하고 있다. 학교라는 시스템의 운영에 가장 큰 몫을 담당하고 있고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이 교사이기는 하지만 학교에는 교사 이외에 급식, 시설, 행정 등 다양한 직군의 사람들이 함께 만들고 있는 작은 세상이다. 교사 이외의 직군 중 상당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신분이며 이들은 자신들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2011년 노동조합을 결성하였으며 2017년 총파업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문재인 정부 이후 비정규직의 무기계약직 전환에 대한 노력이 있었지만, 학교 내에서의 차별은 여전하며 2021년 대법원에서 “같은 업무 하는 교육공무직 근로자 간 차별 처우, 문제없음” 판결이 나오는 등 학교 내 노동자 간 차별은 사회적으로 더욱 공고해지는 양상이다.
학교 안에서의 차별은 구조적인 문제를 뛰어넘는다. 교육행정 당국의 원칙 없는 제도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구성원들 스스로 차별을 내면화하고 있다. 구성원들 스스로 능력에 따른 차별이 당연하다 여기는 인원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차별은 당연해질 것이고 이런 차별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전국교육공무직본부 배동산 정책기획국장은 교육비평 기고문을 통해 ‘학생들은 학교에서부터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행위와 신분적 질서를 적나라하게 보고 자라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학교는 비정규직 종합백화점이 되었고 학생들은 “직업에 귀천이 있고, 우리 사회는 철저한 계급사회”이고 “사람을 차별하고 또한 사람이 차별받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험을 학교에서부터 하게 된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노동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초등학생들조차 “내 꿈은 정규직”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라는 청소년들은 노동이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 현실과 그보다 더 심한 학교의 노동 현실을 보며, 학생들은 입시경쟁을 통해 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한 무한경쟁에 스스로를 내몰거나 아예 절망하여 꿈조차 잃어버리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4.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교육과 사회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학교의 교육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내면화하며 성장한다. 그 사회의 분위기와 가치는 학교의 교육에 힘입은 바 크다. 그렇지만 학교는 그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 사회의 지향은 학교의 교육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사회 구성원들 대부분이 능력주의에 따른 차별을 내면화하게 되었다면 이는 학교의 교육이 경쟁 교육 등을 통해 오랜 시간 동안 사회 구성원들에게 능력주의에 따른 차별을 내면화시켰기 때문이고 이는 사회가 학교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경쟁 교육이 처음부터 능력주의에 따른 차별을 조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구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 대학을 진학하는 인구가 많지 않던 시절, 대학을 나왔거나 그렇지 않거나 임금의 차이가 심하지 않던 시절이 우리에겐 있었다. 많이 배운 사람이 존경의 대상이 될 수는 있었지만 못 배운 사람이 멸시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던 시절, 그래도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이 과일 노점을 해서 자식들 등록금은 감당할 수 있었고 노년에 한 몸 누일 아파트 한 채는 마련할 수 있던 시절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이젠 대학을 나와도 내가 원하는 대기업에 취업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 되었다. 대기업, 공기업, 공무원 등 흔히 말하는 좋은 직장 정규직이 되지 못하면 결혼도, 연애도 사치인 세상이 되었다. 최저임금에 대롱대롱 매달린 월급으로는 학자금 대출도 못 갚을 판이다. 그러니 학교에서부터 더 치열한 경쟁이고 그런 경쟁을 뚫고 올라온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의 사회는 더욱 공고한 능력주의 사회가 되고 이는 다시 더 치열한 학교를 만들고….
5. 밥 주는 사람이 제일 중요한 사람
악순환의 고리는 어딘가에서 끊어야 한다. 최저임금을 대폭 인상하고 노동의 가치를 올려야 한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이고 사람이 하는 노동의 가치이다. 나의 노동과 너의 노동에 계급적 차이가 있다는 인식을 없애야 한다. 밥 먹고 똥 싸는 가장 기본적인 일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야 한다. 의사가 되기 위해 교사가 되기 위해 판사가 되기 위해 들인 노력을 존중하지만 그게 주방 조리사보다 더 많은, 그렇게나 많은 차이가 나는 급여의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되고 더구나 ‘주방 아줌마’와 ‘의사 선생님’의 사회적 대접이 달라서도 안 된다. 왜 대학 청소노동자들이 점심을 화장실에서 먹어야 하는가?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의사 변호사 판검사를 할 수는 없다. 세상의 누군가는 밥을 지어야 하고, 쓰레기를 치워야 하며 집을 짓고 버스를 운전해야 한다. 한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필수노동을 누군가는 꼭 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노동의 가치를 차별한다면 필수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 될 것이고 필수노동자 스스로 열등감과 패배의식에 스스로의 자존감을 잃어갈 것이다.
6. 촛불하나 밝히는 마음으로
대학 입시 제도가 바뀌지 않으면 학교 교육의 정상화는 불가능하다. 입시제도는 학력을 기준으로 하는 차등적 급여와 계급적 직업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 사회에서 직업 간 급여의 차이를 줄이고 정말 직업에 귀천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아이들에게 노동의 가치는 모두 고귀하고 직업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좋은 대학에 가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스스로 아름답게 빛날 수 있다고 격려해야 한다.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직장을 다니게 되는 것이 너 혼자 잘 해서 너 혼자 이룬 트로피로 생각해선 안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너무 어려운 일이다. 나 하나 우리 반 이십여 명 아이에게 이야기한다고 그 아이들이 다 변하는 것도 아니고 너무 무의미한 일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그렇게 변하는 것 아니겠는가? 촛불 하나는 너무 미미해 세상 그 어디도 밝히지 못할 것처럼 느껴지지만 나 같은 촛불 하나가 둘이 되고 넷이 된다면, 나에게 배운 아이들이 세상에 나가 또 하나 촛불을 든다면 그렇게 세상은 조금씩 변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도 교사는 아침마다 내 이야기 들어줄 이십여 명의 아이가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