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을 통한 공동체성의 회복을 위하여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공동체 회복의 위기와 기회

by 마을너머

■ 들어가며

태곳적 원시인류는 동물의 행동 양식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자연의 섭리대로 강자가 약자를 억압했을 것이고 더 많은 것을 차지했을 것이며 타자에 대한 배려나 약자에 대한 보호 같은 것은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문화인류학자 마가렛 미드(Margaret Mead, 1901년 12월 16일 ~ 1978년 11월 15일)에게 한 학생이 ‘인류가 문명화되었다는 첫 증거’가 무엇인지 물었을 때 마가렛 미드는 ‘치유된 인간의 대퇴부 뼈’라고 이야기했다. 토기나 낚싯바늘 같은 대답을 기대한 학생에게 미드는 설명한다. ‘오로지 적자생존의 법칙만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치유된 대퇴부 뼈가 발견되지 않는다. 몸이 약한 자들, 상처를 입은 자들, 장애가 있는 자들을 무시하거나 버리고 떠나는 곳에서도 또한 그 뼈는 발견되지 않는다. 부러진 대퇴부가 다 나을 때까지 그 부상자를 누군가가 돌보아 주었다. 부서진 대퇴부가 다 나을 때까지 누군가가 그 부상자를 위해 사냥을 해서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이는 인류가 문명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준 최초의 증거로 부족하지 않다. 사람들이 함께 살기 위해 공동체를 형성하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 도우며 협력하는 것이 생존에 더 유리함을 깨친 인류는 그렇게 인류 앞에 놓인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갔고 그 과정을 다음 세대에게 전달했다.

공동체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인류 생존에 큰 위기를 불러오고 있다. covid-19라는 시대의 문제 앞에 공동체의 안위보다 개인의 자유가 먼저라 이야기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나는 걸려도 죽지 않을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있다 자신하는 사람 중 적잖은 사람들이 백신 접종을 거부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서구를 중심으로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문화권에서 도드라지게 나타나고 있다. 지난 7월 백신 접종 의무화 방침을 밝힌 프랑스 정부에 대해 마스크도 쓰지 않고 백신 접종센터 건물을 파괴하는 등 대규모 백신 반대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는 공동체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비롯된 문제로 보이며 그 사회의 문화와 교육 시스템에서 차이를 찾을 수 있다. 최근 수년간 서구의 개인주의적 물질문명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한국사회도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으며 공동체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현실의 문제 해결 방법을 마을교육에서 찾고자 한다.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


공동체주의는 1840년대 밤비(Goodwyn Barmby)가 공동체주의라는 개념을 만든 이후 20세기 들어와서는 1982년 샌델(Michael Sandel)이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Liberalism and the Limits of Justice로 출판하면서 공동체주의가 부상하였다. 샌델은 공동체의 공공선과 목적을 배제한 채 설명하는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는 될 수 있을지언정 사람(human being)이 될 수 없다. 인간은 공동체를 구성하고, 공동체에 의해 형성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에 비해 롤스(John Bordley Rawls)는 국가의 역할과 관련해 좋음에 대한 옮음의 우선성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 개인의 권리는 공동체 이익에 우선하며 정의의 원칙은 특정한 신념체계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롤스에게 공동체란 개인에 비해 부차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공동체주의자들은 롤스 철학이 공동체의 가치를 적절하게 평가하지 않고, 공동체와의 관계를 계약적, 수단적으로 이해한다고 비판한다.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고 심지어 최고선의 위치에 올려놓는 자유주의의 경향성은 공동체의 침체나 나아가 공동체의 붕괴에 대해서도 그 원인을 제공한 과도한 개인주의 때문으로 보지 않고 공동체가 근본적으로 인류의 본성에 부합하지 않는 가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공동체의 붕괴


공동체가 붕괴되는 이유는 많이 있겠으나 개인의 자유를 무한히 누리려는 욕심과 공동체를 위해 개인이 희생할 수 있음을 부정하는 개인주의적 성향에서 시작된다. 어느 공동체든 모든 구성원을 항상 만족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황에 따라 나의 이익과 공동체의 이익 혹은 나의 이익과 다른 구성원의 이익이 충돌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으며 이런 상황에서 구성원들 간의 갈등이 시작된다. 이런 상황은 공동체의 성격, 결속력, 이익의 크기, 역할과 지위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지기도 한다. 동등한 구성원 사이의 반복되는 이익의 충돌이라면 순번을 정하는 등의 방식으로 최대한 공평함을 추구하는 것이 가능하고 그 결과에 대한 불만도 많지 않지만, 개인과 공동체의 이익이 충돌하는 경우 그 해결의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다. 여기서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의 갈등이 시작된다.

자유주의자의 개인 중심적 결정은 공동체 전체에 상실감을 안겨주고 지금까지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헌신해온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큰 상처를 남기게 된다. 반대로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게 되면 공동체 내의 자유의지는 무너지고 전체주의로 흐르게 된다.

공동체가 잘 유지되기 위해서는 무상성이 필요하다. 무상성(gratuitousness)은 아마도 인간관계의 양가적 속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일 것이다. 내가 남에게 선사한 무상성이든 남에게서 받은 무상성이든, 무상성의 행위보다 더 값진 것은 없다. 그리고 무상성에 대한 배신보다 더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주는 예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상성을 어떻게 가늠해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무상성에는 금전적 가치를 매길 수 없다. 공동체는 무상성을 기반으로 유지되는데 무상성은 양가적 기능을 하기에 나의 무상성이 배신당하면 그 공동체를 향하는 지지의 동력을 쉽게 잃게 된다.


자유주의는 무상성을 배신한다.


개인의 이익이 공동체의 이익보다 앞서는 자유주의자들에게 공동체를 위한 무상성을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서로의 이익이 충돌할 때 개인의 자유의지로 무상성을 실천할 수는 있으나 항상 이익의 충돌을 피할 수 없으므로 자유주의는 공동체주의의 무상성을 의무의 강제로 이해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자유주의자가 생각하는 공동체는 개인과 공동체 간에 합당한 계약만이 있을 뿐 계약 이외의 무상성은 불필요하며 불가능하다. 자유주의자들에게 모든 관계는 계약에 기반을 두는 것이 절대 선이다. 하지만 모든 관계는 계약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모든 관계를 계약으로만 파악하는 것은 공동체의 발전을 저해한다.

무상성은 무상성을 불러오는 선순환이 이루어져야 더 풍성한 공동체가 되는데 자유주의 입장에서는 받은 무상성이 내가 갚아야 하는 의무로 무게 지워지지도 않는다. 상대방의 자유의지를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상성의 원리가 선순환되지 않으면 공동체는 순환의 고리가 끊기고 각자도생의 고립되고 파편화된 개인으로만 남고 만다. 이것이 자유주의가 공동체의 선순환 구조를 붕괴시키는 원리이다.


공동체의 복원을 위한 고민


공동체의 복원은 꼭 필요하지만, 현대사회는 낮에 활동하는 직장과 밤에 머무는 가정의 위치가 일치하지 않고 그 여유시간도 많지 않아 공동체적 분위기를 느끼거나 그 필요성을 요구하는 경우가 적다. 소수의 사람이 공동체적 지향을 이야기하며 모여 살거나 사는 지역의 공동체를 활성화하려 노력하지만, 그 인원이 적고 효과도 미비하다.

특히 어린 시절 가정 및 학교에서 양육자의 비 공감적 태도, 친구들과 유대관계 형성 어려움, 학교 부적응으로 동질감 형성에 실패하는 등 공동체의 긍정적 에너지를 느껴보지 못한 채 어른이 되는 경우 타인과의 관계를 힘들어하고 은둔생활을 유발한다.


학교에서의 공동체성 회복


학교에서의 공동체성은 매우 중요하다. 원칙적으로 생존을 위한 투쟁의 장이 아니기에 경쟁보다 배움을 조직하는 협력의 경험을 쌓기 좋은 구조이고 나이에 따른 위계가 없는 또래 집단이며 장시간 함께 지낼 수 있는 구조이기에 학교는 공동체성 함양에 매우 좋은 구조이지만 현실에서 학교의 모습은 정글을 방불케 하는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다.

경쟁은 공동체성을 함양하기에 좋은 구조가 아니다. 상대를 밟고 이겨야 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고 더 좋은 점수를 받아야 더 좋은 대학에 가며 더 좋은 대학에 진학해야 더 좋은 직장에서 더 많은 부를 누리고 살 수 있을 거라는 환상에 사로잡힌 현재의 경쟁적 교육체제에서는 공동체를 논하기가 면구스럽다.


코로나 시대의 공동체주의와 인류의 진보


코로나 상황에서의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는 매우 다른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백신과 마스크가 근본적으로 자신의 건강을 위한 행위이지만 논점을 확장해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백신을 맞고 마스크를 쓰는 것과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면 안 되고 개인의 일은 개인이 알아서 처리해야 한다는 사고에서 출발한 백신과 마스크 쓰기의 거부 경향 중 어떤 선택이 인류의 미래에 도움이 될까?

이번 코로나의 치명률은 2% 전후로 보고 있다. 기저질환이나 나이에 따라 편차가 크다. 만약 나이나 기저질환에 따른 편차가 없이 무작위로 증상이 나타나고 치명률이 5% 이상이었다면 백신과 마스크를 거부하는 사람이 지금처럼 많이 있었을까?

인류는 진보하고 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났던 사례는 역사서를 깊이 들춰보지 않더라도 많이 나온다. 인육을 먹었다는 야만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190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유럽에서는 인종 전시라는 이름으로 동물원과 다름없는 시설에서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납치해온 인류를 전시했다. 마지막 기록이 1958년 벨기에에서 자국의 식민지였던 콩고 민주공화국 사람을 전시한 일이다. 이런 자극적인 사안이 아니더라도 인류의 진보는 상당히 더디게 이루어지고 있고 그 이유는 구성원 모두의 동의를 얻은 새로운 생각이 인류 보편으로 전파되는 것이 무척 어려웠기 때문이다.

인류가 지구 상에 등장한 시기를 20~30만 년 전으로 본다면 그 시간의 대부분 인류는 암흑과 같은 시기를 살았고 그나마 종교와 철학의 발전으로 인류다운 모습을 갖춘 것도 많이 잡아야 겨우 2000년을 넘기기 어렵다. 그 2000년의 세월에서도 세상은 느리게 변했고 특히 생각의 전파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나마 사상과 철학을 전파할 수 있는 문자와 인쇄술의 발명과 교육 시스템 개발은 인류가 후퇴하지 않고 느리지만, 꾸준히 발전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거기에 더해 21세기 인류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실시간으로 전 인류의 생각을 공유하고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인류 전체를 단일한 공간과 시간대에 존재하게 했다.


학교의 필요와 교육의 역할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비대면 수업은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학교의 필요성에 대한 의구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초등학생들에게는 학교 내 또래 집단 안에서 만들어지는 사회성과 돌봄의 역할로 학교의 필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지만, 중등 이상의 학생 중 자기 관리가 되고 가정 내 경제 상황이 여유로운 경우는 학교 교육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더 커지고 있다. 코로나 19 이후 특정계층이나 지역에서 사교육 할 시간이 늘어나면서 그렇지 못한 학생과 학습격차가 벌어지는 상황이다. 학교를 단순한 지식의 전달 장소로 생각하거나 국가 시스템 내에서의 형식적 절차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은 개인의 역량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경쟁에서 유리한 지점을 선점하기에 적합한 기회로 여길 것이다. 하지만 학교의 역할이 단순한 지식 공급처이거나 국가시스템상 거쳐야 하는 절차로만 기능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비록 한국사회에서의 교육이 1980년대 이후 입시 중심의 경쟁 교육으로 인해 왜곡된 부분이 많지만, 인류는 오랜 시간 교육을 통해 지식을 전달한 것은 물론 인성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촉발된 대안적 교육모델의 필요


입시 중심의 공교육 시스템은 그 폭력적이고 경쟁적인 현실 때문에 오랜 시간 변화에 대한 압력을 받아왔다. 90년대 후반 등장하기 시작한 대안교육운동과 2000년대 들어 생겨난 혁신학교 등의 영향으로 학교의 폭력성은 많이 사라진 모습이지만 경쟁을 통한 입시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인지 공교육의 입시 중심 탈출은 요원한 상황이다. 이런 현실 인식에 균열을 가지고 온 인류의 문제가 생겼다. 바로 코로나 19이다. 이는 위기이자 기회이다. 인식의 전환을 가져올 기회로 삼아야 한다.


코로나는 인류에게 전하는 마지막 경고이다.


사람들은 코로나로 인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간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음을 경험하고 있다. 출근을 꼭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만나서 해야 하는 일이 있음을 알았고, 꼭 등교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함께 공부하는 것이 더 즐겁고, 반드시 만나야 하는 미팅과 화상으로 할 수 있는 회의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이런 인류사적 위기가 앞으로도 빈번하게 일어날 수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는 지금까지 인류가 살아온 방식에 대 전환을 만들지 않으면 더 커다란 위기로, 극복할 수 없는 파국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알게 하였다. 코로나는 인류에게 지구가 전하는 마지막 경고일지 모른다.


교육을 변화시켜야 한다.


이런 인류적 대 전환을 강제하는 위기 앞에 인류는 겸손해야 한다. 지구적 재앙 앞에 경쟁의 우위를 위한 사교육을 생각하는 것은 침몰하고 있는 여객선에서 1등 객실을 차지하겠다고 악다구니 쓰고 있는 것과 다른 바가 없다. 지금의 코로나 위기가 지나가고 나면 그 뒤를 따를 위기는 기후와 환경 문제일 것이다. 이런 지구적 재앙은 사람들에게 교육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게 하고 있다. 다가올 위기를 극복할 유일한 수단은 공동체성의 회복뿐이다. 나의 존재가 혼자서는 생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든 생명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공동체성의 회복은 마을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제는 ‘공존(共存)’이 희망의 키워드다. 공존은 ‘공감(共感)’이 있어야 가능하며, ‘공유(共有)’의 기반이 있어야 유지된다. 공감은 다양성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태도를 전제로 한다. 마을학교는 일상의 삶과 배움을 일치하는 주체의 발달과 성장을 중심에 두는 삶의 학교이자, 성인들과 아이들이 함께 성장하는 학습 과정이다.

마을은 개인이 고립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릴 수 있는 최전선이다. 학교 스스로 공동체성을 회복하기를 기대하기엔 어려움이 많이 있다. 마을이 도와야 한다. 경직된 관의 행태를 보이는 학교를 변화의 장으로 끌고 나와야 한다.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마을학교이다.


■ 맺는 글


코로나로 인해 인류의 현재를 적나라하게 보게 되었다. 자유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식민지를 건설하며 부를 축적한 서구 열강들이 위기의 순간에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우리는 보았다. 그들의 자유주의적 사고는 결국 전 인류의 진보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우리 한국사회는 그런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 공동체를 회복하고 재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사회 전반의 변화를 위해선 교육이 중요하고 교육이 바로 서기 위해선 마을공동체의 회복이 필요하다.

공동체주의는 항상 국가주의 혹은 전체주의라는 누명을 쓴다. 인류의 역사에서 파시즘의 광기에 많은 흑역사가 있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인류가 인류일 수 있는 것은 결국 내 옆의 누군가와 어깨 걸고 함께 진보의 한 발 걸을 내디뎠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자유로운 개인이 좀 더 행복하기 위해 고민한 흔적이다. 이 고민의 지점에 다다르지 못한 자유주의는 인류 진보의 발걸음에 쇠사슬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공동체는 사슬을 끊어 그 자리에 차마 버리지 못한다. 그렇게 끊어진 사슬을 어깨에 짊어지고 다시 한 걸음 나아간다. 그것이 공동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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