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옳다는 절대적 믿음
내가 옳다는 절대적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내가 양보하지 못하는 절대적 믿음은 무엇이고 이는 어디에 그 근거를 두고 있을까? 이런 믿음이 갈등의 근거가 된다면 사람들은 어느 정도까지 양보하거나 수용하는 것이 가능할까?
선거 과정 전에 많은 사람이 주변 지인들에게 흔히‘밭을 간다’라고 이야기하는 행위를 한다.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 혹은 인물에게 표를 줄 것을 부탁, 설명, 강요, 회유, 매수, 읍소 등 그 행위도 매우 다양하다. 정치에 관심이 많지 않거나 자기 확신이 크지 않은 사람들은 이 행위를 통해 투표행위의 결과가 바뀌기도 한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나에게 밭을 갈아 온다면 나의 투표행위 결과에 영향이 있을까? 단언컨대 변화가 없을 것이다. 한국 정치의 비정상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식적인 정치 구도라 하더라도 나의 선택이 타인의 ‘밭 갈기’에 좌우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거철이 되면 많은 가정에서 싸움을 벌이곤 한다. 각자의 신념과 철학이 담겨 있는 주제이다 보니 항상 첨예하고 자신의 이익이 걸려있는 문제이기도 해서 많은 사람이 크게 관심 두는 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부분 싸움으로 끝나는 이유는 많은 사람이 자신의 신념이나 가치를 타인의 설명으로 변화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2. 절대 권력의 절대 부패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도 사회갈등은 존재했다. 인류의 역사는 갈등의 발생과 해결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새로운 생각은 기존의 질서와 충돌했고 그 과정에서 전쟁이나 학살 같은 참혹한 사건이 일어나기도 한다.
중세 유럽은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단일 사상에 의한 사회 지배 기간이었을 것이다. 기독교가 등장하면서 기존의 질서를 위협한다고 느꼈던 구체제는 기독교를 박해하기도 했지만, 기독교가 주요 가치로 인정받은 이후엔 다른 가치가 설 수 있는 자리가 없게 되었다. 하나의 가치가 모든 것을 지배하고 그 가치의 힘이 너무 강해 갈등이라 부를 수 있는 다른 가치를 찾을 수 없었다. 이렇듯 사회갈등이라 부를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았던 중세는 인류에게 축복과 같은 시기였을까? 흔히 ‘암흑기’로 불릴 만큼 중세는 인류의 행복과는 거리가 먼 시기였다. 단일 가치가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사회는 그 가치를 소유한 집단의 절대 권력화로 흐르기 마련이고 이런 흐름은 절대 권력이 절대 부패하며 인류를 나락으로 떨어트릴 뿐이다.
3. ‘갈등’은 인류를 구원한다.
이렇듯 강력한 중세의 가치는 어떻게 그 종말을 맞게 되었을까? 마녀사냥이 횡행하던 어둠의 시기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인류에게 새로운 생각이 전파될 수 있었기 때문이고 그 생각이 기존의 가치와 ‘갈등’을 일으킬 수 있을 만큼 힘을 키웠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가톨릭의 전횡에 분노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들 모두는 신의 이름으로 불태워졌을 뿐이다. 갈등을 일으킬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대가 흘러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변화가 시작된다. 과학의 발달은 인류를 조금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게 만드는 힘이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직접적인 변화를 불러오기도 한다.
종교개혁의 아버지 마틴 루터는 인쇄술을 ‘하나님의 최고의 그리고 최근의 선물’이라 말한다.
“인쇄업의 커다란 호의에 대해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이를 통해서 거룩한 성경이 모든 언어와 방언으로 열렸으며, 보급되었다. 이를 통해서 모두가 예술과 학문을 보유하고, 증가시키며, 우리의 후손들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인쇄술은 이를 통해 하나님이 복음의 일을 전파하기 위한 ‘최고의 그리고 최근의 선물’이다. 그것은 세상의 멸망에 앞선 마지막 불꽃이다…….(Martin Luther.)”
인쇄술의 발달은 성경의 번역과 보급을 가져왔고 이는 성경의 해석을 통한 종교적 권위와 절대적 힘을 가지고 있던 교회의 힘을 약화시켰다. 이는 평신도들이 직접 성경을 읽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게 되었다. 물론 이런 갈등의 시작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기득권 세력은 번역 성경을 불태우고 성경을 번역한 윌리엄 틴데일을 화형에 처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힘을 키운 평신도들의 힘에 기반을 둔 ‘갈등’은 종교개혁을 불러오게 되었다.
인류는 갈등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열게 되고 이런 갈등을 위한 힘의 성장과 절대 권력의 후퇴는 과학의 발달 등 전혀 직접적이지 않아 보이는 곳에서 출발하기도 한다.
4.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
갈등이 변화의 시작이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변화의 결과가 항상 긍정적이지는 않다.
사드 배치가 추진되면서 성주지역은 큰 갈등에 휩싸였다. 한국과 미국 그리고 중국과의 국제적 역학관계가 얽혀있어 풀기가 쉬운 문제는 아니겠으나 해당 지역의 직접 당사자인 성주 주민들에게는 생존이 걸려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국내 정치지형에서도 거대 양당이 사드에 대한 견해차가 분명하게 존재하는 사안으로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보인다.
국방부는 2022년 6월 16일 성주의 주한미군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기지에 대한 일반환경 영향평가를 추진하기 위해 협의회 구성에 착수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부터 공약으로 제시한 사안인 만큼 모두가 예상 가능한 결과이다. 이에 사드 반대 단체 회원들은 “소성리를 지켜온 성주 주민은 이에 맞서 싸울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고 있지만 사드 배치로 인한 갈등의 당사자인 성주군의 대선 투표 결과를 보면 이재명 18.20%, 윤석열 78.71로 경상북도 전체 투표 결과인 이재명 23.80%, 윤석열 72.76%보다도 오히려 윤석열에 대한 투표율이 더 높다.
투표행위는 현대사회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주요한 정치 행위이다. 본인들의 의사를 표현하고 이를 수용할 대표를 선출하는 것은 복잡한 현대의 갈등을 일차적으로 해결해주는 수단임이 분명하다. 대통령 선거 투표의 향방이 단일 사안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겠으나 지역의 주요 현안에 대한 요구와 상반되는 투표행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첫 번째 해석은 성주군의 사드 반대 여론이 과대 표집 되어있다는 해석이다. 성주군의 78%가 넘는 주민들은 사드 배치를 찬성하고 있으며 이를 환영하고 있으나 소수인 18%의 사람들이 반대를 강하게 이야기하고 있고 이것이 외부에 큰 목소리로 표현되고 있다는 해석이다. 사안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난다면 과대 표집 되는 목소리에 의한 갈등의 확대는 사회를 피곤하게 만들 수 있어 조정될 필요가 있다.
두 번째 해석은 본인들의 필요와 요구,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적 방법의 연결에 서툰 지역주민들이라는 해석이다. 투표라는 정치적 행위를 통해 나의 의지를 대신할 대리인을 선출하는 것이라는 의식이 서로 연결되지 않으면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라는 속담처럼 갈등의 해결을 위한 바른 해법을 찾지 못하게 된다.
5. 돈이 종교가 된 사회
현대 한국 사회에서 돈은 종교가 되었다.
종교의 특징은 절대적 믿음 혹은 무조건적인 믿음에 있다. 어렵고 팍팍한 세상의 나를 신이 구원해 줄 것이란 믿음이 이런 절대적, 무조건적인 믿음의 원천이다. 사람들 관념 속의 신이 현세의 내 삶을 구원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인간은 나의 구원을 돈에서 찾기 시작했다. 과거 한국사회에서는 ‘채면’으로 대표되는 남의 시선이 매우 중요한 행동의 지침이었다. 이는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해결의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과거 돈을 좋아한다는 세간의 평은 매우 모욕적인 표현이었다. 지위가 높을수록 사람들의 평가가 중요할수록 속으로는 돈이 좋아도 그걸 대놓고 표현할 수 없었다. 하지만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공동체가 붕괴되었고 이는 나를 보호해주는 아무런 장치도 없는 상황에서 채면 때문에 나의 생존을 포기할 수 없다는 인식이 만연하게 되었다. 이런 사회분위기는 물질에 대한 집착과 욕망이 그리 큰 흠결이 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었다. 이는 ‘솔직함’이나 ‘쿨함’으로 포장되었지만, 타인에 대한 배려보다 내 이익이 먼저인 사회를 만들어 갔다.
이런 사회 분위기는 갈등의 양상을 바꾸었다. 서로에 대한 무관심은 서구적 개인주의 양상을 띠게 되지만 집단주의적 성향이 개인주의적 성향으로 변화한 것이 아닌 물질에 대한 개인주의적 욕망만 발현되면서 분양아파트와 임대아파트의 갈등같이 차별적이고 계급적 갈등이 등장하는 등 갈등의 양상은 더욱 복잡해지기만 했다.
6. 다이내믹 코리아
한국사회는 갈등도 다이내믹하다.
빠르기도 빠르지만 과격하기도 과격하다. 사람 한둘쯤 죽어 나가는 것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이익 앞에 부끄러움을 모르기도 하거니와 나와 다른 생각의 사람을 무찔러 이기고야 말겠다는 신념 앞에 방법은 무엇이 되었든 승리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부인 정경심 교수는 표창장을 위조했다는 죄목 등으로 4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전 법무부 차관 김학의는 특수강간 등의 혐의로 검찰에 송치되었으나 검찰은 “피해 여성들의 진술이 믿을 만하지 않다”라며 무혐의 처분을 내려 논란이 되었다. 한국의 사회갈등 중 절반은 정치권이 만들고 절반은 법원과 검찰이 만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언론의 부채질이 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총체적 난국이다.
7. 상처는 상처로 치료되지 않는다.
하나의 생각이 사회 주류로 인정받게 되면 그에 반하는 이야기를 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한국 사회가 집단주의 문화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해와 수용, 관용의 폭이 매우 좁기 때문일 것이다. 잃을 것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야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순간의 오해로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는 사람들은 특히 예민한 문제에 입을 열기가 무척 어렵다. 50대 남성, 그중에서 평소 진보적 성향을 내보였다면 젠더 문제에 대해 말을 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지지의 발언 아니면 조용히 있어야 한다. 날카롭게 날이 서 있다. 무어라 한마디 하기가 천 길 낭떠러지 위를 걷듯 조심스럽다. 나와 다른 생각의 사람들과 웃으며 이야기하기엔 내가 받은 상처와 아픔이 너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받은 억압의 상처는 나와 다른 생각의 누군가를 핍박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세상에 나와 똑같은 피해자를 내 손으로 만들 뿐이다.
8. 교육이 문제다!
한국의 사회갈등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많은 부분 교육문제에서 비롯된다. 청소년기 아이들은 또래 아이들과의 사회에서 갈등을 겪고 조정하고 양보하며 해결하는 연습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학교를 활용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학교는 서로 갈등이 생길 만큼 친밀한 공간이 되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친구들은 모두 경쟁상대로 인식하도록 만들어진 시스템이다. 경쟁을 통해 강자와 약자로 구분되고 그 구분 안에서 적응하도록 만들어졌다. 이 교육 시스템은 계급적 차별을 용인하도록 능력주의를 부추기고 승자에게는 교만을 패자에게는 열등감을 심어준다.
모든 것이 대학입시로 결정되는 단판 승부에서 입시를 위한 공부 이외에는 그 어떤 배움도 의미가 없기에 내 투표행위와 내 필요의 상관관계에 대해 고민할 여력이 없는 교육과정을 통해 성인으로 자라나고, 자본에 대한 욕망의 투영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인간에 대한 예의 없음을 승자의 보상으로, 힘 앞에 비굴함을 패자의 숙명으로 여기며 살아가게 만든다. 이런 과정을 통해 어른이 된 판사, 검사, 기자, 정치인들은 정의롭지 못하고 이익 앞에 순수하며 나의 권리는 당연하고 약자의 권리는 무시하는 사람들로 길러진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변화를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사회가 조금이라도 성장하도록 노력하는 많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다.
갈등은 인류의 숙명인지 모른다. 세상 모든 사람이 한 생각을 가지고 살 수도 없지만, 만약 그런 사회가 있다면 얼마나 무서운 세상인가? 세상의 평화와 안녕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과거 사회갈등은 전쟁과 폭력으로 나타났다면 현재의 사회갈등은 정치와 법으로 대표되는 다수결과 재판의 영역이다. 더 나은 세상은 대화와 협상을 통한 인정과 수용의 세상 아닐까? 하지만 이런 세상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교육과 훈련이 필요한 이유다
중고등학교 정규과목에 ‘갈등 해결과 개인의 역할’ 정도의 과목이 개설되는 상상을 해본다.
∎ 글을 마치며
갈등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이다. 주변 사람들과의 갈등 상황을 매우 불편해하는 성향이고 주변의 갈등에 대해서도 조정하거나 조율하는 입장일 때가 많다. 개인 간의 갈등 상황에서 서로의 의견을 잘 들어주는 편이고 각자의 입장을 수용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훈련된 모습인지 타고난 성향인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MBTI, 에니어그램에 관한 공부도 해봤고 더 근본적인 성향을 알아보기 위해 명리학도 공부해 봤다. 이를 통해 개인 간의 갈등을 이해하고 수용하거나 혹은 외면하는 것이 세상을 조금은 편하게 살아가는 방식이라 스스로 생각하지만, 갈등의 양상이 내가 지켜야 하는 신념이나 가치에 대한, 혹은 가족 조직 공동체의 가치를 흔드는 일이라면 수용하거나 타협하는 것이 무척 어렵다.
나를 포함한 전 인류가 자신을 둘러싼 갈등으로 스트레스받기보다는 갈등을 변화와 성장의 기회로 인식하게 될 그날을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