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을 찾아 떠난 설악산, 젊은 날 기억과 천상의 조찬
아내와 살아서 가볼 100곳 다섯 번째 여행지는 설악산이었다. 단풍을 기대하면서 오랜만에 산악회원들과 찾은 설악산은 때를 맞추지 못해 아직 푸르렀다. 젊을 적 기억과 많이 달라진 설악의 모습을 보며 그때의 꿈과 내가 살아온 길이 다름을, 그럼에도 여전히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2019. 10. 12
설악의 가을 단풍은 국내산 중 최고라 할 수 있다. 한국산악회 울산지부에서 기획한 설악산 장거리 산행에 동참해 오랜만에 아내와 누나와 함께 설악 단풍을 만나기로 했다. 12일 밤 8시경 동천체육관을 출발해 밤새 설악으로 향했다. 지부회원들과의 월례산행을 오랜만에 함께하니 반가움을 안고 동해안 해안도로를 달렸지만, 잠은 오지 않아 운전기사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해바다를 지나는 길에 수평선에서 솟구치는 태양이 구름 사이로 붉은빛을 바다에 뿌리고 있었다. 이번 여행은 설악단풍을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가보고 싶은 곳 다섯 번째' 나들이라 기대를 안고 설악동에 들어갔는데 아뿔싸, 때가 일렀다. 단풍은 아직 산꼭대기에만 머물러 녹음이 그대로였다.
기대와 현실이 다를 때가 많다. 여행은 이것이 실패가 아니라 새로운 발견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늘 가르쳐준다. 붉은 단풍 대신 초록의 생명력을, 계획했던 풍경 대신 예상치 못한 아름다움을 만났다고 받아들이기에 따라 여행하는 마음의 색깔도 바뀐다.
우리는 이어 토왕골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숲의 청량한 기운이 기분을 상쾌하게 했다. 이른 아침이라 등산객도 없어 산이 온전히 우리 것 같았다. 단풍이 한창이었으면 만끽할 수 없었던 기분일 것이다. 토왕골에 들어서자 암반을 미끄러지듯 떨어지는 맑은 물이 소에서 비췻빛으로 빛나며 저절로 감탄을 자아냈다. 계곡이 아름다운 모습을 내비칠 때마다 대원들의 걸음은 느려지고 스마트폰은 바빠졌다. 산의 아름다움은 카메라에 담아도 그 일부조차 온전히 담을 수 없다.
관광객 안전을 위해 설치된 철계단을 오르자 비룡폭포가 소화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힘찬 물줄기를 내뿜고 있었다. 예전엔 토왕성 폭포까지 직접 들어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출입이 통제되어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우리는 이날 산행의 정상을 전망대로 정하고 수많은 철계단을 올랐다. 이마와 등줄기에 땀이 배어 나오자 재킷을 배낭에 넣고 쉬엄쉬엄 올랐다.
드디어 전망대에 오르니 병풍처럼 펼쳐진 바위산과 하얀 물줄기를 떨구는 토왕성폭포가 장관이었다. 가을 하늘의 구름도 폭포를 구경하듯 멈춰 있어 한 폭의 동양화를 완성시켰다. 우리는 가져온 유부초밥, 떡, 빵, 과일을 펼쳐놓고 "천상의 조찬"을 즐겼다. 가볍게 신선주를 곁들이니 우리는 자연스레 신선이 되었다.
조찬이 끝날 무렵 많은 등산객들이 줄지어 올라왔고, 우리는 하산했다. 젊은 시절 토왕성폭포의 좌우벽 암벽등반과 빙벽등반은 내가 가장 도전하고 싶었던 곳이었지만, 이루지 못했다. 88년 처음 히말라야 고산등반을 시작하면서 암벽등반보다 고산등반을 추구하게 되어 토왕성폭포 등반의 꿈은 놓아주어야 했다.
산을 오르며 깨달은 것은 모든 꿈을 다 이룰 수는 없다는 것이다. 비록 하나의 꿈을 포기하는 것이 아쉬울지언정 내가 선택한 꿈을 더 크게 키우는 바탕이 될 수 있다. 토왕성의 수직 벽면 대신 히말라야의 8천 미터 봉우리를 택했고, 그 선택이 나를 더 넓은 세상으로 이끌었다. 인생도 산행처럼 때로는 과감하게 방향을 바꿔야 진정한 정상에 오를 수 있는 법이 아닐까.
많은 행락객들이 줄지어 그들의 길을 걸었다. 우리는 명상의 길을 따라 숲 속을 걸었는데, 이곳엔 행락객이 없어 아무 생각 없이 걸을 수 있었다. 이것이 진정한 명상길이다. 명상길을 지나 계곡의 돌다리를 건너 비선대 방향으로 가니 많은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있다. 산이 주는 기운이 그 속의 사람들에게도 번진 듯했다.
비선대로 가는 길에 음식점들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그곳에서 허기를 달래려 했지만, 비선대까지 모든 상가가 철수되어 판매처 없이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내가 그만큼 오랫동안 설악을 찾지 않았던 것을 잊었던 것이다. 다시 찾지 않은 장소는 기억 속 시간으로 얼어붙은 듯 멈춰있었다. 세월의 흐름을 알고자 하면 재회가 필요한 법이다.
공룡능선과 천불동으로 산행하는 팀과 통화한 후 우리는 천천히 설악동으로 이동했다. 35년 전 신혼여행으로 겨울 설악을 올랐던 기억을 떠올리며, 언젠가 아내와 손잡고 대청봉에 올라 기념사진을 찍고 일출을 맞이해야지 하고 아내 몰래 다짐했다.
설악의 단풍도 만나지 못했고 기대했던 맛있는 음식도 먹지 못했지만, "천상의 조찬"을 즐겼으니 '가보고 싶은 곳 다섯 번째'는 이렇게 마무리했다. 어쩔 수 없이 남은 약간의 아쉬움을 달래고자 내 얼굴에라도 단풍을 들이고 싶어 곤드레막걸리와 파전으로 설악의 가을 속으로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