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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에루 Mar 06. 2019

그가 꿈에 나왔다 08

8번 방의 기적


에덴 홀에 그를 만나러 오는 손님들은 그가 10년간 몸 담았던 앞선 가게에서부터 이어진 인연들이 많았다. 나보다 10살 이상 많은 30대 후반의 남자들이 많았고 그들은 결혼보다는 연애와 친구들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도 여자보다는 친구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것이 그들이 에덴 홀을 찾아오면 손님을 대하기보단 친구처럼 어울렸다.


종종 단골들은 그의 영업 종료 시간까지 술을 마시고 마감을 기다리다 함께 나가 밥을 먹거나 술을 한잔 더 하기도 했다. 그렇게 늦은 시간까지 내가 자리하는 날엔 나 역시도 그 자리로 초대받아 함께 어울렸다.


기분 좋게 마신 그가 만취가 되면 자리에서 사라지는 습관이 있다는 것은 그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내가 그의 ‘실종’을 처음 겪은 날은 너무 놀래 주변 사람들에게 이를 알리느라 혼비백산했는데 알고 보니 그는 취하면 꼭 뉴스 노래방의 8번 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했다. 정말 뉴스 노래방에 가서 8번 방의 문을 여니 그가 있었다.


“어 그래 아윤아, 이제 왔어?”


왜 이제 왔냐는 반가운 얼굴로 izi의 응급실을 부르며 인사하는 그 모습을 보고 힘이 쭉 빠져 그날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노래는 희로애락은 있었지만 썩 훌륭한 편은 아니었고 어딘가 기괴한 느낌까지 들어 그 뒤로 그를 나는 8번 방 지박령이라고 불렀다.  






우리의 첫 ‘데이트 아닌 데이트’는 여의도에서 만나 노량진까지 벚꽃을 구경하며 걷다 회를 먹고 헤어지는 간단한 약속이었다. 전날 늦게까지 일을 하고 맞이하는 휴무인만큼 그가 만나는 시간을 정했다. 살짝 늦은 점심시간쯤 약속 장소인 여의나루 전철역 출구에 먼저 도착한 사람이 전화를 하기로 했다.


새삼스럽게 나는 이날 준비 시간이 오래 걸렸다. 아무래도 대낮에 처음 만나는 자리인지라 몇 달간 알아왔던 사이지만 처음 만나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저녁에 조명이 센 실내에서만 보다가 자연광이 비치는 야외에서 그를 만나는 것은 새로웠다. 신중하게 고른 옷을 입고 평소보다 몇번이나 거울을 더 보다 약속 장소에 딱 맞춰 도착했다  전철역 출구에 먼저 도착한 나는 보이지 않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다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로 그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저 먼저 도착한 거 같아요.”

“어어. 나도 거의 다 와가. 아주 잠시만 기다려!”


뒤늦게 경쾌해진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강을 바라보며 이어폰 속 음악에 집중하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두드렸다. 생각보다 피곤한 얼굴의 그가 인사를 건넸다.


“미안해, 늦었지!”

“아니요, 제가 좀 일찍 왔어요.”

“꽃 보려면 이쪽인가? 가볼까?”


얼굴은 다소 피곤했지만 캐주얼로 말끔하게 차려입은 그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에덴 홀에서는 정장류의 의상만 입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어려 보이는 옷차림의 그가 낯설었다. 게다가 항상 밤에 일하고 낮에 쉬는 직업을 10년 넘게 하는 그인지라 또래 남자에 비해 하얀 피부가 눈에 띄었다.


“오빠, 생각보다 하얗네요.”

“아, 그래? 햇빛을 볼 일이 거의 없어서 그럴 거야. 오 꽃이 많이 폈네?”


스치지 않을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며 걷는 나와 그의 머리 위로 꽃이 흩날렸다.


“난 벚꽃 엄청 오랜만에 본다.”

“아 진짜요? 난 재작년엔 꽃구경 갔고 작년엔 그냥 동네에서 봤는데.”

“계속 바쁘기도 하고, 쉬는 날 나오려고 맘먹기도 쉽지 않고 그래서 오랫동안 못 봤네.”

“올해는 그래도 꽃구경할 맘도 생기고 대단하네요.”

“그러게, 올해는 누구 덕에 꽃구경도 하네. 좋다.”


별 소란이나 액션 없이 잠시 쉬기도 하고 대화를 이어가다 노량진까지 온 우리는 회 한 접시에 본격 낮술을 시작했다.


별로 까다롭지 않은 그의 입맛과 나이에 비해 아저씨 입맛인 나는 좋아하는 메뉴나 식당 선택이 쉬웠다. 회를 떠서 근처 식당으로 가서 처음처럼 한 병과 맥주 한 병을 시켰다. 쏘맥으로 시작하여 소주로 이어가는 습관을 가진 그는 절대 내게 술을 권하거나 먹이지는 않았다. 나는 마실 수 있는 만큼만 마시면 되고 그는 서운해하지 않는 점도 우리가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중요한 이유였다.


회를 다 먹어갈 때쯤 우리는 제법 취해있었다. 나도 그도 함께 술을 마신 이래로 이렇게까지 취한 적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보는 눈이 없는 편안함에 항상 만나던 환경이 아닌 새로운 곳에서 함께 나누는 대화는 언제나처럼 재밌었다. 그리고 기분이 좋아서 마시는 술은 빠르게 취한다. 식당을 나서며 그가 제안했다.


“우리 노래방 가서 한 시간만 놀다 헤어질까?”


8번 방의 지박령이 노래방으로 나를 초대했다. 이미 취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택시에 올라 타 뉴스 노래방으로 가는 일뿐이었다. 택시 뒷자리에 타자 노곤함이 밀려왔다. 등받이에 기대 온몸의 힘을 빼고 눈을 감고 있는데 그가 조심스레 내 손에 깍지를 꼈다. 조심스럽지만 망설임 없는 스킨십이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맞잡은 손의 느낌이 낯설었지만 설렜다.  


뉴스 노래방 8번 방에 도착한 그는 노래를 몇 곡 선곡했다. 노래가 흘러나오자 한 손에는 마이크, 한 손에는 내 손을 잡았다. 술이 취해 이 상황이 마냥 웃겼던 나는 손을 내어주고 그의 노래를 들었다. 언제나처럼 그의 노래는 가창보다는 느낌이 강한 스타일이었다. 그는 계속 화면을 보고 노래를 하면서 내 얼굴을 확인하듯 바라봤다. 이어서 내가 예약한 노래가 나왔다.  


적당한 발라드를 골라서 부르니 그가 손을 놓고 새로운 노래를 예약했다. 당연하게 그는 다시 내 손을 잡았다. 머리를 벽에 기대고 노래를 하다 다시 잡힌 손에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의 얼굴이 아주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피하지 못한 내 입술과 그의 입술이 만나는 순간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서로에게 솔직할 수 있게 되었다. 긴 시간을 알아가며 우리가 나눈 대화보다 솔직하고 정직했다. 내가 선곡한 노래의 반주가 끝나고 노래방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박수소리 속에서 우리는 한동안 갈증을 채우듯 계속 키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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