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 고백
생일을 기점으로 그와 나는 직원과 손님의 관계에서 조금 더 가까워지기 시작했다고 나는 기억한다. 나이 차이가 제법 난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도 있고, 워낙 캐주얼하게 시작된 그와 나 사이는 이성의 느낌이 하나도 없이 담백했다. 그런 우리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생겼다.
나의 변화라면 늘 봐오던 그를 내가 더 의식하게 된 부분이다. 새삼스레 그가 잘생긴 사람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기도 하고 항상 외국인 인사처럼 에덴 홀에 올 때마다 하던 가벼운 포옹도 낯설어졌다. 그는 웬만하면 다른 바텐더가 나를 응대하게 하지 않았다. 나보다 더 오랜 시간 에덴 홀을 방문한 단골 손님들에게 허물없이 나를 인사 시키고 함께 어울렸다. 집에 가려는 나를 '조금만 기다렸다가 같이 밥 먹고 들어가'라는 말로 마감까지 붙잡는 날이 조금씩 늘었다. 그러나 생일보다 강하게 그를 이성으로 의식하게 된 계기는 성식이형의 고백이었다.
또래였던 성식이형은 바텐더들 중에서도 나와 장난을 많이 쳤다. 성식이형은 종종 새로운 칵테일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나를 마루타 삼아 이상한 음료를 먹이고 나는 그 음료들에 혹평을 내리곤 했다. 성시경을 좋아해 콘서트도 가던 나는 종종 성시경은 너무 좋은데 성식이형은 별로라는 식으로 놀리기도 했다. 성식이형은 본인의 집이나 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내게 많이 털어놓았는데 이제 생각해보면 불필요하리 만큼 개인적인 이야기를 내게 많이 했다. 이런 징조들이 나에 대한 감정이라고 눈치챌 만큼 나는 연애에 촉이 좋지 않았다.
우리도 눈치채지 못한 나와 그 사이의 감정의 변화를 제일 먼저 알아챈 성식이형이 가장 먼저 그와 나 사이의 묘한 기류를 물어왔다.
“너... 팀장님이 너 좋아하는 거 알지?”
무슨 말을 해도 놀라지 않겠다고 약속한 후였지만 너무나도 황당한 소리에 나는 당황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무시를 할수록 성식이형은 확신에 찬 태도로 나를 추궁했다.
“너도 팀장님 좋아하고 팀장님도 너 좋아하는데. 둘이 얘기는 해본 거야?”
“지금 무슨 말 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데?”
“우리 가게 사람들은 당연하고 단골손님들까지 팀장님이 너 좋아하는 거 유명한데, 왜 둘이서 서로 모르는 척하는 거야?”
“팀장님이 절 좋아한다는 게 그게 무슨 말인데?”
한 번도 내게 이성이라고 인식된 적 없는 그가 이미 나를 좋아하고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라는 말이 마치 서태지 이지아의 이혼설처럼 한 번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저씨가 나를 이성으로 보는데, 그 아저씨가 이미 나를 좋아하는 상황이라는 건 결혼도 안 한 서태지가 이미 헤어진 전 배우자가 있다는 것과 매한가지 아닌가. 차라리 나보고 그를 좋아하냐고 물었다면 머뭇거렸을지 모르지만 그가 나를 좋아한다는 질문은 예상치 못했다.
“팀장님이 너 말고 다른 여자 손님들 왔을 때 옆에 앉는 거 봤어? 원래 진짜 친한 형들이 올 때나 옆에 앉는데 네 옆에는 거의 항상 앉잖아.”
“앉는 거 가지고 그렇게 말하는 건 좀 비약 아닌가? 그리고 원래 팀장님은 여자 손님이 아예 없잖아. 내가 어떻게 '여자' 손님이야, 그것도 마성의 게이 바텐더한테.”
“그럼 니가 남자야? 너 오면 팀장님이 나서는 것도 그렇고, 사장님도 단골 형들도 네가 놀러 오면 태환이 형 여친 왔다고 하는데 너랑 팀장님만 모른다고?”
어떻게 반박해도 자꾸 반복되는 추궁에 대답하지 않자 성식이형이 한번 더 훅 들어왔다.
“근데 내가 너 좋아하는 건 너 아냐?”
첫 번째 공격에 이미 비틀거리고 있던 나는 연이은 공격에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 네?”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아냐고 물어봤어”
‘아, 남의 고백만 하는 줄 알았는데 본인 고백도 하는구나’까지 생각이 미치자 잠시 정신이 돌아왔다.
“아… 일단 음.. 어.. 알았어요. 그런데 오빠 고백은 미안한데.. 미안해요.”
“아냐고 물어봤는데 벌써 거절이네. 거 봐, 너 팀장님 좋아하잖아.”
“음, 그 부분은 오빠한테 대답할 부분은 아닌 거 같고... 일단 좋아해 주는 마음은 고마운데 내가 지금 누굴 사귀고 그럴 상황이 아닌 것 같아요. 미안해요.”
“응, 그래. 그렇게 대답할 것 같았어. 그래도 말하고 나니까 좀 나은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이런 말 했다고 어색해지지 않기다!”
어색해지지 않기로 말하며 아주 어색하게 대화를 마친 성식이형이 돌아서자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그가 와서 물었다.
“너희 심각하게 뭔 이야기 했어?”
“음, 오빠가 저 좋아한다는 이야기?”
다른 변명이 떠오르지 않은 나는 장난기를 최대치로 끌어올린 능청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아직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설마 그가 나를 좋아하는 게 맞을까 싶어 확인해보고 싶은 생각에 내 딴에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순발력을 발휘한 대답이었다.
“어휴, 우리 아윤이 내가 진짜 좋아하지. 그런 당연한 이야기를 뭐 그리 심각하게 해?”
설마 했지만 역시나. 아니나 다를까 능청스럽게 긍정하는 그의 대답에서 그는 나를 좋아할 리 없다는 나의 가정에 확신이 실렸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너무 다른 우리가 서로에게 이성이 되기는 쉽지 않은 일인 건 확실했다. 그렇기에 더욱더 조심하고 이성이라고 의식하지 않고 쌓아온 우정이 우리에게 중요하다고 나는 믿었다. 성식이형의 대리 고백으로 인한 당황도 잠시 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말이에요. 오빠가 나 좋아한 거 하루 이틀도 아닌데 왜 이렇게 다들 심각한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말이야, 이럴 땐 한잔 해!”
이렇게 일단락되는 것 같았던 대리 고백은 새로운 부메랑이 되어 내게 돌아왔다. 며칠 뒤 그의 휴무일에 맞춰 그는 처음으로 벚꽃구경을 가자고 먼저 연락했다.
‘일요일에 뭐해? 회 사줄게. 먹는 김에 벚꽃도 좀 보고.’
그와 내가 에덴 홀이 아닌 곳에서 만나는 첫 만남이 성사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