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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율 Feb 10. 2018

크레셴도 크레셴도 : 안목 높이는 법 9

<1828년 11월 29~30일>

-1828년 11월 29일~30일


 베이커 씨는 그 소동이 지난 후 본인 의사와는 상관없이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그 일이 벌어진 지 한 달이 넘게 지났지만, 악마에게 영혼을 판 미치광이가 나타났다는 소문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만 했다. 몇몇 사람들은 베이커 씨로 보이는 환쟁이가 육중한 몸을 이끌고 악마에게 제사를 지내고자 크리스토발 산을 오르는 걸 몇 차례 봤다고 강조했다. 그 산은 콜론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우기가 계속되는 지금 같은 날씨에선 누구도 쉽게 발을 딛지 않는 장소였다. “그 천둥 치는 밤에 혼자 중얼대며 뭘 태우는 걸 분명 봤단 말일세.” 아르곤 주인장인 피니간 씨는 안면 있는 손님이 올 때마다 안줏거리 내놓듯 떠들었다.


 『아트 파이낸스』는 이 같은 미술계의 ‘이단아’ 등장을 애써 외면했고, 베이커 씨 또한 큰 움직임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눈총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밖에 나와 그림에만 매달렸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동네 젊은 사내들은 베이커 씨를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돌팔매질을 했고, 몇몇은 부정(不淨)이 염려된다고 해 그가 다니던 길목마다 소금을 뿌려댔다. 젊은 나이에 미쳐버려 안됐다는 등의 수군거림은 그가 있는 바로 뒤에서도 이어졌다. 집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의 담장 아래는 쓰레기가 가득했다. 크게 고함이라도 치면 상황이 나아졌겠지만, 그는 이상하리만큼 아무 저항 없이 콜론을 떠돌며 그림만 그렸다.


 베이커 씨를 만난 후 올드벅은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평소 속이 여린 탓도 있겠지만 그는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넋이 나간 상태였다. 몇 번이나 아르곤에서 함께 술을 마셨지만, 그는 “오늘이 며칠인가?”, “그때부터 붓을 들 수 없네”는 등 말만 중얼댔다. 몇 시간씩 떠들던 올드벅의 철학은 속 안에서 녹아내린 듯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날 밤 지나가 그가 이상하다며 화상 문을 세차게 두드렸을 때 나는 드디어 올 게 왔다고 생각했다.


 “어서요. 올드벅이 이상해요.”


 지나에 따르면 그녀는 작업실에서 화상으로 오기 위해 마을 광장을 둘러오다 강물 위로 종이 수십장이 떠내려오는 걸 봤다. 그건 단순한 종이가 아니었다. 올드벅의 그림이었다. 깜짝 놀라 발원지를 찾아 올라가니 포르토벨로 다리 아래 올드벅이 서 있었다.


 그는 아무 표정 없이 쪼그려 앉아 자기 그림들을 강물에 띄워 보내는 중이었다. “뭐 하는 짓이에요!” 지나가 소리쳤지만, 그녀를 본 그는 나지막이 미소를 짓더니 마치 밥을 먹기 위해 숟가락을 들 듯 자연스레 그림 한 장을 다시 들었다. 올드벅의 초점 없는 눈을 본 지나는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일로 판단, 나를 찾아 애타게 뛰어온 것이다.


 올드벅은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평소 결벽증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수백 장 그림을 크기별로 나눠 차곡차곡 쌓아둔 후 한 장씩 천천히 강물 위로 띄우고 있던 차였다.


 “이봐, 뭐 하는 건가.” 내가 그의 손에서 그림 한 장을 낚아채며 소리쳤다. 두 소녀가 행복한 표정으로 피아노를 치는 장면이다. 진한 술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올드벅은 이런 내 모습에 전혀 놀란 기색 없이 가만히 내 쪽으로 손바닥을 펼쳐 되돌려달라는 듯 위아래로 두어 차례 흔들었다. 나는 쪼그려 앉아있는 그의 어깨를 세차게 흔들면서 귀에 대고 정신 차려야 한다고 떠들었다.

 “나는 이 일을 해야 하네.” 올드벅이 입을 열었다. 그간 얼마나 말을 안 했는지 그의 목소리는 거미줄을 타고 올라오듯 쩍쩍 갈라졌다. “나는 이것들을 남김없이 없애야 해.”


 “갑자기 왜 그러느냐는 말일세. 이건 자네가 수십 년간 그린 그림들이라고. 인생 전부란 말이야.”


 “이 쓰레기들은 세상에서 사라져야 하네. 이제라도 깨달아서 다행이야.”


 “무슨 말을 하는 거에요?” 올드벅 몰래 쌓은 그림들을 빼돌리고 있던 지나가 더는 못 참겠다는 양 쏘아붙였다.


 “제기랄.”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왔다. 올드벅은 울고 있었다. 울음소리는 조금씩 커지더니 이내 통곡하듯 울어댔다. 나와 그녀는 힘이 풀린 그를 부축하며 화상으로 이끌었다. 우리는 남은 그림들을 챙기기 위해 광장에서 화상까지 몇 차례 다시 다녀와야 했다. 작품 상당수는 물에 젖고 구겨졌지만, 아예 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올드벅은 화상 소파에 누워 눈물범벅인 상태로 자는 중이었다. 나는 왠지 모를 동정심이 일었다.


 “이거, 베이커 씨와 관련 있는 거죠?” 지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럴 개연성이 높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작자를 잘 알지 못하지만요.” 그녀가 말했다. “그 사람이 정말 싫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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