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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율 Feb 11. 2018

크레셴도 크레셴도 : 안목 높이는 법 10

<1828년 11월 29일~30일(2)>

-1828년 11월 29일~30일(2)


 다음 날 눈을 뜨니 비가 오는 중이었다. 창을 여니 하늘은 온통 먹구름으로 이따금 천둥소리도 들려왔다. 전날 나와 지나는 각자 생각에 잠겨 말없이 30여 분을 더 걷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이불을 뒤척이자 지나도 눈을 떴다. "몇 시죠?" 그녀가 말했다. "아직 오전 7시도 안 됐어. 좀 더 자도 돼." 지나는 자세가 불편한 듯 한숨을 한 번 쉬고 등을 돌리더니 다시 잠들었다.


 1층 화상으로 내려가니 등이 굽은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잠에서 깬 올드벅이었다.


 하지만 잠에서 깬 시간이 오래되지 않은 양, 아직 기억의 조각을 맞추는 듯 어지러워 보였다. 발소리에 뒤를 돌아보더니 나라는 걸 확인한 후 다시 시선을 거뒀다.


 "몸은 어떤가?"


 "내가 어제 무슨 짓까지 한 건가?" 올드벅이 내 말을 못 들은 척 잘라 말했다.


 "어느 정도 기억은 나는 모양이군."


 "그림은 어떻게 처리했나?"


 "그래도 절반 넘게 살아남았을 거야. 젖은 게 더 많겠지만."


 "헛수고를 했군." 올드벅이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런 건가?" 나는 말을 달리해서 다시 물었다. "어제 자네, 서럽게 울었어."


 "그럴 만도 하지." 올드벅이 말했다. "그 날도 베이커 씨를 만났거든."


 올드벅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어디까지 말을 할지 생각 중이었다. 그러나 선을 그어 말하기엔 이미 늦었다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올드벅은 나와 베이커 씨 집을 나온 그 날 늦은 밤 다시 그를 찾았다고 했다.


 그 남자의 말이 상처가 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분명 문을 잠그고 나왔는데 다시 보니 열린 상태였다. 올드벅은 문을 열고 그를 불렀다. 불이 훤히 켜져 있다. 그 사이로 육중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베이커 씨는 그때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 사람은 아직 낫지도 않은 몸으로 밤낮없이 그림을 그리는 건가. 정말 제정신이 아니군.’ 또다시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멱살이 잡히든, 한 방 얻어맞든 할 말은 하고 오자. 올드벅이 마음을 다잡고 문을 밀치려는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문틈 사이로 그림이 보였다. 올드벅이 그 사람의 그림을 정면으로 마주 본 첫 순간이었다.


 "옆모습의 인물화를 그리더군." 올드벅이 말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걸 그리는 것처럼 보였어. 커다란 캔버스에 한쪽 눈밖에 그려지지 않은 상태였으니 말이야. 예쁘거나 우아한 그림은 아니었지.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그렇듯 세부적인 데생도 미약했네. 그자의 이름을 부르려고 할 때 나는 그 눈을 봤어. 그림 속 인물이 분명히 내게 말했다네. 지금 이 사람의 붓질을 방해하지 말라고. 그건 경고였어. 그 순간 나는 이곳을 찾아온 이유를 잊어버렸네. 솔직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어. 그저 손과 발이 미친 듯이 떨리더군.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그 시간은 이 바닥에서 다시 찾아오지 않을 위대한 작품이 탄생하던 순간이었어.”


 그는 도망치듯 밖으로 뛰쳐나왔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 경험은 어떤 오르가슴 이상으로 황홀했다. 그렇게 비틀대며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수십 년간 그린 그림들을 마주했다. 올드벅은 한스만큼 기교는 아니라도, 인물화 하나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으로 살아온 남자였다. ‘내가 찬사를 듣고 싶어 그림을 그린다고? 역시 그따위 장난질보다는 내 그림이 훨씬 고귀해.’ 중얼댈 때 마음 한편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연기처럼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형편없다.


 올드벅이 그의 그림을 보고든 생각이었다. 그는 숨을 내뱉는 법을 잊어버린 듯 몇 초간 멈춰 있다가 그 자리에 그 날 먹은 음식들을 모두 토해냈다.


 제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올드벅은 생소한 걸 제대로 마주했을 때의 충격이며, 이로 인한 후유증일 뿐이라고 자위했다.


 아편도 처음에는 얼마나 큰 충격을 줬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몸에 좋은 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 정리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건 바람일 뿐이었다. 종일 그림 속의 눈빛만 떠올랐다.


 단지 그 이유로 베이커 씨를 다시 찾아가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화가로의 자신을 그토록 모욕한 남자를 찾아 다름 아닌 그의 작업물에 관심을 둔다는 건 웃긴 일이다.


 하지만 그게 정말 위대한 무언가라면? 죄수 같은 남자가 무슨 짓을 하기 전에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애초 붓을 안 잡은 지는 오래됐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시간만 흘러가는 사이, 베이커 씨가 올드벅의 집 문을 두드린 것이다.


 "지나가다 들렀다나. 차림새는 늘 그렇듯 거지꼴이지만 혈색은 완전히 돌아왔더군. 나는 그 사람도 지난 일로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네. 자네야 그렇다고 해도 화가 중에서는 나만큼 그에게 애정을 품은 사람은 없으니. 나는 베이커가 툴툴대는 말투라고 해도 진심 어린 사과 한마디를 해주길 바랐어. 그 사람도 나에 대한 지난 일로 마음이 좋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어. 그런 기색이 전혀 안 보이더군. 오히려 큰 숙제를 끝낸 듯 홀가분해 보였어. 내 그림들을 천천히 살펴보더군."


 베이커 씨는 평소처럼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올드벅의 그림은 늘 알록달록했고, 여자들은 아름다웠다. 설사 예쁘장한 모델이 아니어도 그는 그 순간은 세상 누구보다 아름답게 종이로 옮겼다. "환쟁이는 창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했던가?" 베이커 씨가 말했다. 평소 빈정대는 말투가 아니었다. "자네는 진실로 이것들이 창이라고 생각하나?"


 그는 그 말을 하고 떠났다.


 올드벅은 혼자가 된 이후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 얼굴이 확 달아오른 게 술기운 때문인지 그 남자로 인한 뜻 모를 부끄러움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겨우 몸을 지탱해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도 머릿속은 베이커 씨의 말이 지배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림들을 다시 둘러봤다.


 새의 울음소리는 곱다. 숲속 여린 잎을 쓰다듬는 바람 소리는 사람들은 편안하게 한다. 하지만 소리들은 어떤 말도 전달하지 않는다. 아무 의미가 없는데도 아름다움을 느껴진다. 미술에서의 아름다움은 그런 것이어야 한다…. 이 말을 누가 했던 말이었던가. 툭. 올드벅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어떤 밧줄 하나가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 그림들은 하나 같이 너무 많은 말을 전달하려고 한다. 불편하다. 하루 봄을 팔기 위해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고 콜론의 밤거리를 떠돌아다니는 사창가의 여인같다.


 모두 예쁘지만, 모두 똑같은 얼굴이다. 머리카락 색과 옷차림, 체형은 미묘하게 다르지만 근본적으로는 수학 공식에 끼워 맞춘 양 똑같은 느낌이다. 말이 아닌 감정을 전하지 않는다.


 기실 사명감이 있다면 이따위 그림을 그려서는 안 됐다. 그는 작업장에 있는 그림들을 미친 듯이 긁어모아 수레에 실었다. 그렇게 광장 옆 강가에 도착했고, 그 작업을 하던 중 지나에게 덜미가 잡힌 셈이다.


 "그래서 말이야…."


 올드벅이 입을 떼려던 순간 지나가 축축하게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매만지며 나왔다. 그녀의 단조로운 인사에 올드벅은 수줍은 듯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씨들, 이거 눈길 가지 않아요?"


 지나가 남자 목소리를 흉내 내는 듯한 특유의 장난기가 어린 어투로 말했다. 어제 일은 더 걸고넘어지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투였다. 그녀는 아트 파이낸스 최신판을 내밀었다.


 그 문구는 1면 한 귀퉁이를 장식했을 뿐이지만, 다른 기사들과 달리 명암이 있어 눈에 확 들어오는 구조였다. 『아트 파이낸스』가 ‘소동’으로 엉망이 된 전시를 만회하기 위해 새해에 맞춰 새 전시를 준비하고 있고, 그간 표방했던 가치를 살려 개최 전날까지 작품을 받겠다는 내용이다. 앞으로 한 달이다.


 "응. 확실히 눈길이 가." 내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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