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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율 Jun 11. 2023

그녀가 쏜 3번째 총알이 몸 관통…죽다 살아났지만

[위대한 악동-앤디 워홀 편]

"졌다."


앤디 워홀은 로버트 라우센버그와 재스퍼 존스 작품 앞에서 혼잣말을 했다. 나는 왜 저런 생각을 못할까. 워홀은 입술을 깨물었다. 식은땀에 젖은 두 손을 거듭 폈다가 오므렸다. 나는 여기까지인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로버트 라우센버그, 모노그램 [rauschenbergfoundation.org]
재스퍼 존스, 깃발 [미국 뉴욕 모던아트 뮤지엄]

워홀은 광고업계에서 상업 작가로 경력을 쌓았다.


실력은 좋았다. 돈도 꽤 벌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워홀은 좀 한다는 수많은 상업 작가 중 한 명일 뿐이었다. 그는 1등이 아니었다. 이 판에선 1등이 되기도 어려워보였다. 워홀은 기민했다. 자기 상황을 잘 알았다. 그는 광고업계에서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존재였다. 이름을 더 알리고, 명성을 더 탄탄히 쌓으려면 남다른 일을 해야 했다. '구두 광고' 말고 진짜 구두를 그려볼까? 워홀은 저변을 상업 미술에서 순수 미술까지 넓히기로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상업 미술계에서는 매일 돈 타령꾼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순수 미술계로 와보니 웬 예측불가능한 괴짜 놈들 천지였다. 한쪽에선 동굴벽만한 캔버스에 물감을 덕지덕지 찍어내고 있다. 또 다른 쪽에선 특이한 걸 박제해 세워놓고, 무슨 만화책 쪼가리 같은 걸 들고 와 걸고 있다. 당황스러웠다. 워홀은 그 별종들 틈에서 뭐라도 해야 했다. 제 딴에는 좀 특이하게 그린 삽화를 갖고 전시를 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순수 미술을 한다더니? 아직 상업 디자이너 티를 못 벗었군." 이런 악평만 쏟아졌다. 그 말이 맞았다. 라우센버그와 존스의 전시품을 본 워홀은 아직 독창적인 스타일을 찾지 못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나는 저 수준에 갈 수 없는가. 분했다. 눈물이 왈칵 났다.

에두아르도 파올로치, i was a rich man's plaything [www.tate.org.uk]
로이 리히텐슈타인, 행복한 눈물 [로이 리히텐슈타인 재단]

"뭘 해야 이길 수 있을까."


워홀은 보는 사람마다 물어봤다. 누군가는 에두아르도 파올로치처럼 광고 따위를 오려 붙이는 콜라주를 추천했다. 다른 누군가는 로이 리히텐슈타인처럼 만화 양식을 제안했다. 워홀은 이들 방식에도 손대봤다. 사실상 흉내내기였다. 역시나 또 실패였다. "따라쟁이는 받지 않아." 갤러리는 손사래를 쳤다. "그냥 널리고 깔린 상품, 거기서 하나 골라 뭘 어떻게 해보면 안 돼?" "어떤 상품?" "음…. 가령 풍선껌 같은 것 말이야." 워홀은 친구에게 이 말을 듣자 왠지 몸이 근질거렸다. 꽤 그럴듯했다. 확실히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런 상품은 무엇일까. 이제 워홀의 고민은 이것밖에 없었다. "어머니, 저 왔어요." 워홀은 생각에 잠긴 채 집에 왔다. 그는 허기를 느끼고 식탁 의자에 앉았다. 빵 한 조각, 캠벨 수프 통조림을 꺼내왔다. 그가 20년간 먹던 메뉴였다. 툭. 워홀은 멍하게 캠벨 수프 통조림 뚜껑을 땄다. 익숙한 소스 향이 코를 찔렀다. 어, 잠깐. 이거…. 힘이 탁 풀렸다. 이 캠벨 수프라면 혹시…? 깡통이 바닥에 떨어졌다. 진득한 수프를 쏟아내며 빙그르르 굴렀다. "앤디, 무슨 일 있니?" 워홀은 어머니 말을 듣고서도 그대로 굳었다. 캠벨 수프야말로 모르는 이가 없었다. 시장 점유율도 압도적이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불꽃놀이가 펼쳐지고 있었다.

앤디 워홀, 32 Soup Cans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1962년 7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페레스 갤러리에서는 그간 볼 수 없던 작품이 등장했다.


서로 다른 32개 맛의 캠벨 수프 통조림 32개였다. 실물은 아니었다. 따라 그린 인쇄물이었다. 도발적이게도 이 작품들은 진짜 상품인 양 식료품 진열대 같은 선반 위에 올려졌다. 워홀의 작품 '캠벨 수프 통조림'이었다. 당시 캠벨 수프 통조림은 개당 29센트였다. 그렇다면 이 통조림 인쇄물 값은? 개당 100달러였다. 발칙한 짓이었다. 장난치는 건가? 페레스 갤러리와 경쟁하는 주변 갤러리들은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진짜 캠벨 수프 통조림 5개를 1달러에 팝니다. 저기 걸린 가짜보다 싸고 맛있어요!" 짓궂은 누군가는 페레스 갤러리 앞에서 장사를 했다. 그런데 이번 건은 나름대로 먹혔다. 32개 중 6개뿐이지만, 일단 예약 판매가 되긴 했다. 예술성도 인정받았다. 워홀은 통조림 32개를 담담하게 그렸다. 과장도, 장식도 없었다. 단순하게 툭툭 찍어내는 상업 미술판의 틀을 복잡하게 고뇌하는 순수 미술판에 갖고 왔다. 대중매체 광고 같은 이 그림도 흘리고, 던지고, 끼얹는 너희들의 그 고상한 그림만큼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누구나 다 아는 캠벨 수프 통조림도 마크 로스코의 작품처럼 심오할 수 있다고 외치는 듯했다. 추상표현주의에 지친 사람들이 하나, 둘 통조림 앞으로 다가왔다. 이 또한 예술이 되는구먼? 일단 충격을 받았다. 같은 모양의 통조림은 대량생산으로 평준화된 사회를 뜻하는 게 아닐까. 자세히 보니 통조림 그림 32개가 제각각 조금씩 다른데, 이는 개성을 밟아놓곤 뒤늦게 독창성을 강요하는 세태 고발이 아닐까. 해석도 이어졌다.

앤디 워홀, Campbell's Soup Multicoloured [MoMA, New York]

오, 재밌네?


페레스 갤러리 책임자인 어빙 블럼은 이 흐름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마음 크게 먹고 워홀에게 공간을 준 블럼은 통조림 예약 판매 건을 다 취소시켰다. "이봐. 이 작품은 32개가 다 있어야 의미가 있다니까?" 블럼은 워홀을 설득했다. 그는 32개를 1000달러에 샀다. 블럼의 직감이 맞았다. 워홀은 곧 팝아트 거장으로 올라선다. 블럼이 1000달러를 주고 산 작품은? 33년 후 140만 달러에 팔린다.


병약했던 소년, 더 큰 야망을 품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앤디 워홀.

워홀은 192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州) 피츠버그에서 태어났다.


워홀은 탄광 인부였던 아버지를 거의 볼 수 없었다. 대신 어머니 옆에 찰싹 붙어 컸다. 워홀은 여리고 병약했다. 걸핏하면 아팠다. 기어코 8살 때는 얼굴과 손발에 경련이 생기는 시드넘 무도병(Sydenham’s chorea)을 앓았다. 크게 앓고서는 몸을 필요 이상으로 염려하는 심기증에 시달렸다. 워홀은 이 무렵 학교도 안 갔다. 침대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는 만화책을 봤다. 유명 영화배우와 야구 선수의 카드를 모았다. 광고가 들리는 라디오를 만지작거렸다. 어른이 된 워홀은 이 시기가 자기 예술관에 큰 영향을 줬다고 회상한다.


그런 워홀이 딱 하나 흥미를 갖는 배울 거리가 있었다.


예술이었다. 워홀은 어릴 적부터 그림을 즐겨 그렸다. 춤, 음악, 미술을 골고루 즐긴 어머니는 그런 아들 손을 잡고 걸어갔다. 발걸음은 카네기 미술관 앞에서 멈췄다. 당시 무료 드로잉 수업을 하던 곳이었다. 어머니는 쪼그려 앉아 아들을 바라봤다. 혈색 없던 두 볼은 설렘으로 새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이제 워홀은 또 무엇이 잘못돼 몸져누울 때도 슬프지 않았다. 눈 뜨면 어머니가 워홀을 위해 수놓은 자수가 보였다. 어머니가 깡통, 박스 등 버려진 물건을 가지고 와 보란 듯 만든 공예품도 볼 수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워홀이 사진을 찍어보고 싶다는 말에 어머니는 카메라를 선물했다. 사진 인화를 해보고 싶다는 말에 어머니는 집 지하에 암실을 만들었다. 워홀은 그 덕에 예술가로 한 발씩 나아갈 수 있었다. 워홀이 15살일 때 아버지는 죽었다. 워홀은 홀몸이 된 어머니를 42년간 모시고 함께 살게 된다.

앤디 워홀, A la Recherche du Shoe Perdu [The 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l Arts, Inc.]

워홀은 첫발을 상업미술계로 내디뎠다.


워홀은 고향에 있는 카네기멜론대학교 상업미술학과에 진학했다. 1949년에 무난히 졸업했다. 워홀은 직후 책 삽화, 보그(VOGUE)나 하퍼스 바자(Harper's BAZAAR)와 같은 잡지 광고, 신발 홍보물 등을 만들며 돈을 벌었다. 1952년, 워홀은 자기 드로잉을 갖고 개인전도 개최했다. 그림은 거의 팔리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그는 아직 젊었다. 호기심이 가득했고, 이를 지탱해 줄 기운도 넉넉했다. 1956년에 연 워홀의 전시는 나름 괜찮았다. 화려한 장식의 구두 그림이 있었다. 그 위에 상표처럼 트루먼 카포트, 메이 웨스트,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유명 인사들의 이름을 붙였다. 나름 기발하다는 평이었다. 그림도 어느 정도 팔렸다.

앤디 워홀, Shoe advertisement for I. Miller [The 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l Art, Inc]
리처드 해밀턴, 도대체 무엇이 오늘날의 가정을 이토록 색다르고 매력 있게 만드는가

라이프(Life)에 전시 기사도 났다.


하지만 순수 미술에도 야망을 품은 워홀은 문장이 마음에 안 들었다. 워홀은 기사에서 그저 상업 예술가(Commercial Artist)로 등장했다. 눈을 어디에 달고 다니냐며 항의하고 싶었다. 워홀은 얼마 후 꽤 이름난 상(Award for Distinctive Merit·New York Art Director Club)을 받고 난 후 표정을 풀었다. 순수 미술계도 주목하는 트로피였다. 내가 이 정도라니까! 워홀은 본격적으로 디자이너 아닌 화가로 데뷔할 준비를 했다. 돈은 벌 만큼 벌었다. 6만7000달러짜리 타운 하우스도 샀다. 이제 그가 갖고 싶은 건 불멸의 명성이었다. 마르셀 뒤샹은 변기, 리처드 해밀턴은 사탕 든 보디빌더를 안고 와 순수 미술판을 흔들었다. 에두아르도 파올로치는 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성, 재스퍼 존스는 성조기와 과녁, 숫자 등을 갖고 흔들리는 판을 휘어잡았다. 그렇다면 나는 뭘 챙겨가야 하지?


‘추상표현주의 시대’에 반란…이제 팝아트다!  

잭슨 폴록, 심연
마크 로스코, 오렌지와 노랑 [올브라이트녹스미술관, 버펄로]

1950년대 미국은 추상표현주의 전성시대였다.


1956년, 잭슨 폴록이 불안정한 삶을 끝마쳤다. 음주운전이었다. 폴록은 그렇게 갔으나 추상표현주의는 여전히 힘이 있었다. 마크 로스코, 바넷 뉴먼 등 뉴욕 화단 1세대가 맥을 이어갔다. 특유의 단순하면서도 깊이 있는 그림을 계속 만들었다. 분명 이 또한 위대한 행보였다. 그러나 추상표현주의에는 치명적 약점이 있었다. 대중성이 거의 없었다. 전문가와 돈 좀 있는 컬렉터야 폴록의 '심연' 같은 걸 보고 손뼉을 쳤지만, 대중 대부분은 의아한 표정만 지었다. 예술은 매너리즘에 빠졌다.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s sake)'로 갈라파고스화가 되는 듯했다. 대중들 사이에선 "말만 번지르르하고 젠체한다", "자본에 잠식돼 꿈보다 해몽만 내지른다"는 식의 불만이 커졌다.

앤디 워홀, Self-portrait [Detroit Institute of Arts]

워홀은 그 균열을 비집고 들어왔다.


나는 고상한 척 안 할게. 너희들, 이런 것 좋아하지? 워홀은 캠벨 수프 통조림을 가득 챙겨와 이렇게 외치는 듯했다. 워홀은 솔직했다. 그의 작품은 친숙했다. 복잡한 제작 방식, 난해한 해석, 고뇌가 낳은 예술혼은 없어보였다. 워홀의 손끝에서 팝아트(Popular Art·대중예술)가 꽃을 피웠다. 예술이란 그저 유쾌한 재치, 위트있는 풍자만으로도 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했다. 그렇게 철옹성 같던 '그들만의' 예술 벽이 무너졌다. 예술의 영토는 끝없이 팽창했다.

앤디 워홀, Mona Lisa [Blum Helman Gallery, New York]

그렇다고 워홀의 반란에 알맹이가 없는 건 아니었다.


워홀은 익숙함 속 물신주의(物神主義)에 대한 비판을 심었다. 워홀은 32개 맛의 통조림 32개를 슈퍼마켓 진열대에 올린 양 전시했다. 사람들은 야채 맛, 소고기 맛, 토마토 맛 등 다양한 선택지 앞 구매를 고민하는 상상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를 골랐다고 한들 이는 수십, 수백만개 공산품 중 하나일 뿐이다. '야채 맛은 영양소가 풍부해요', '토마토 맛은 소화가 잘돼요'란 식의 광고가 영향을 줬을 가능성도 있다. 옷, 모자, 신발, 나아가 집, 차, 여행상품 등을 사들여도 이런 매커니즘(mechanism)이 작동되기 쉽다. 워홀은 그런 소비사회를 비판했다. 특별한 무언가를 자유롭게 선택하는 듯한 감정을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윗선의 행태를 저격했다.


워홀이 정확히 이런 메시지를 담았는지는 알 수 없다.


누군가 "이 작품은 어떤 의미인지요?"라고 물으면 워홀은 늘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데요?"라고 되물었다. 나름의 해석을 듣고나면 항상 "그 말도 일리가 있어요"라고 답변했다. 워홀은 신비주의틱한 모호한 말로 인해 더 관심받았다.

앤디 워홀, Ethel Scull 36 Times [The 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l Art, Inc]

1964년, '통조림 사건' 이후 승승장구한 워홀은 뉴욕에 작업실을 만들었다.


공간 이름은 팩토리(The Factory)였다. 알루미늄 포일, 은빛 그림물감이 가득했다. 워홀은 사람을 뽑았다. 대놓고 예술 노동자로 명명했다. 이제 워홀은 기계와 다른 사람 손을 빌렸다. 판화와 비슷한 실크스크린 기법을 활용했다. 그가 나서지 않고도 그의 그림이 쏟아졌다. 캠벨 수프 통조림이 한 화면에 50개, 100개, 200개씩 담기기도 했다. 워홀은 그 결과물을 비교적 싼 값에 팔았다. 돈벌이는 쏠쏠했다. 이는 난해한 그림 한 점에 하세월을 쏟는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확인 사살이었다. 24시간 돌아가는 공장을 향한 공격적 미러링이었다.


마릴린 먼로 죽자…“어? 잠깐” 영감 번뜩  

앤디 워홀, Gold Marilyn [MoMA, New York]

1962년 8월5일, 마릴린 먼로가 죽었다.


공식 사인은 약물 과다복용이었다. 미국 대중문화의 상징은 여러 의문을 남긴 채 사망했다. 온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워홀의 마음은 묘하게 어수선했다.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았다. 워홀은 작업실로 갔다. 먼로의 여러 사진을 펼쳤다. 가장 먼로다운 표정, 가장 먼로다운 색감을 물색했다. 시선은 먼로 신화를 이끈 영화 '나이아가라' 스틸컷에서 멈췄다. 워홀은 이에 색을 입혀 실크스크린으로 복제했다. 그렇게 '황금색 마릴린 먼로'를 만들었다. 워홀의 감은 적중했다. 먼로의 팬들은 먼로를 놓지 못했다. 여전히 곁에 두고 싶어했다. 재탄생한 먼로의 소장 가치는 충분했다.

앤디 워홀, Marilyn Diptych [Tate Gallery, London]

워홀은 먼로를 한 차례 더 변주했다.


먼로의 얼굴로 이면화를 만들었다. 보통 교회에서 쓰는 제단화 일종이었다. 대중문화의 여신처럼 받들어진 그녀라면 소화할 수 있을 형식으로 판단했다. 왼쪽 패널에는 금발 먼로가 주황색 배경 앞에서 고혹적 미소를 짓고 있다. 오른쪽 패널에는 흑백 먼로가 얼룩진 상태, 흐릿해지는 모습으로 있다. 왼편 먼로는 영화와 광고계에서 만들어낸 먼로의 환상이다. 오른편 먼로는 불우하고 불안한 삶을 산, 이 때문에 한때는 발작과 말 더듬을 달고 살던 먼로의 진짜 모습을 암시하는 듯하다. 워홀의 먼로는 흥행했다. 주문이 폭주했다. 워홀은 팝아트의 새로운 길을 또 찾았다. 스타는 많다. 스타가 만들어낼 이야기는 무한하다. 워홀은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와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 두 여인에게도 관심을 가졌다. 대중에게 선망 대상이지만, 질곡의 개인사를 지닌 그녀들을 다시 소환했다. 말론 브란도, 제임스 딘 등도 작품 활동에 활용했다. 워홀의 손에서 재탄생한 스타들은 모두 흥행했다.

앤디 워홀과 테네시 윌리엄스. [NYWTS]

이쯤 워홀은 유명했다.


너무 유명해서 유명한 것으로 유명했다. 뭘 해도 화제였다. 이른바 '워홀리즘(Warholism)'이란 말도 탄생했다. 워홀은 작가가 셀럽이 돼야 한다는 걸 일찍부터 깨달았다. 대중매체가 판치는 이 사회에선 인플루언서 위치로 올라야 몸값과 작품값 모두 비싸진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사인을 하고 있는 앤디 워홀. [Los Angeles Times]

워홀은 자신을 알리는 데 힘 쏟았다.


돈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워홀은 가발을 쓰고 등장했다. 그만의 교복 같은 옷을 정해 '앤디 슈트'라고 명명했다. 워홀은 팩토리로 록밴드 롤링스톤스의 믹 재거, 배우 재키 커티스 등 유명 인사들을 초대했다. 이들과 파티를 벌였다. 이제 그에게 팩토리는 영감의 원천이었다. 파티는 인맥 관리의 장이었다. "끝내, 워홀의 가장 위대한 작품은 워홀 자신이 됐다." 이런 말도 나돌았다. 워홀은 선행도 이어갔다. 워홀은 독실한 신자였다. 그는 가톨릭교회에서 진행하는 노숙자 대상 자원봉사에 매년 함께했다.


총 맞고 쓰러진 워홀…기적적 살아남다  

앤디 워홀, Warhol, Elvis 1 and 2 [Art Gallery of Ontarion, Toronto]

1968년 6월3일, 워홀도 죽을 뻔했다.


권총 테러였다. 그가 40살 때였다. 밸러리 솔라나스는 페미니스트 작가였다. 성향은 급진적이었다. 솔라나스는 알코올 의존증을 겪은 할아버지에게 폭행당하면서 컸다. 아버지에게 성적 학대도 당했다. 그녀는 남성을 극도로 증오하며 성장했다. 솔라나스는 뉴욕으로 상경했다. 그녀는 "모든 남성을 제거해야 한다"는 내용의 남성근절단체(SCUM) 선언문을 썼다.


워홀은 그런 솔라나스의 야성을 인상 깊게 봤다.


워홀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팩토리의 단골이 된 그녀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워홀은 그가 만든 영화에 그녀를 출연시키기도 했다. 어느 날 워홀은 솔라나스에게 '알 게 뭐야'(빌어먹을·Up Your Ass)라는 제목의 연극 대본을 받았다. "이 작품을 무대에 올려줄 수 있겠어요?" 솔라나스가 말했다. 솔라나스는 워홀이 자신의 예술성을 인정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이 제안도 성사될 것으로 확신했다. 하지만 워홀은 떨떠름해했다. 애초 워홀은 솔라나스가 '특이한 사람'이라 곁에 뒀을 뿐, 그 이상 감정은 없었다. 그녀가 준 원고도 지나치게 외설스러웠다. 대본은 어딘가에 처박혔다.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메리 해론작) 영화 포스터

솔라나스는 배신감을 느꼈다.


불안정했던 솔라나스는 이 감정을 눈덩이 굴리듯 불렸다. 워홀이 일부러 모욕을 주고 있다는 생각까지 했다. 워홀은 새로운 영화에 섭외해주겠다고 달랬지만, 이 또한 조롱처럼 느껴졌다. 문제의 그날, 솔라나스는 폭주했다. 권총을 쥐었다. 팩토리에 들어갔다. 워홀에게 한 발을 쐈다. 빗나갔다. 또 한 발을 쐈다. 스쳐 간 듯했다. 세 번째 총알을 발사했다. 이번에야말로 워홀의 폐, 위, 식도를 관통했다. 솔라나스는 워홀 옆에 있던 미술 평론가 마리오 아마야에게도 총을 갈겼다. 워홀의 매니저도 쏘려고 했지만, 탄환이 걸려서 포기했다. 솔라나스의 지인에 따르면 솔라나스는 범행 직전 "나는 워홀을 쏴죽이겠어. 그러면 내가 유명해져 극본도 유명해질테니, 그때 가면 극본을 공연하겠지"라고 말했다. 그녀는 범행 후 유유히 떠났다. 워홀은 쓰러져 피를 쏟았다. 현장은 비명과 절규로 아수라장이었다.

밸러리 솔라나스. [Inside Edition]

병원에 실려간 워홀은 의사들에게 사망 선고를 받았다.


그만큼 위독했다. 흉부를 열고 심장 마사지를 해야 했다. 워홀은 끝내 눈을 떴다. 기적이었다. 그는 응급 수술 후 병원에서 2개월여를 살고 퇴원했다. 목숨은 건졌으나 후유증은 상당했다. 워홀은 평생 의료용 보호대를 차고 살게 된다. 삶과 작품 활동에도 그늘이 내려앉게 된다. 솔라나스는 자수했다. "워홀이 내 삶을 통제했다." 그녀는 이렇게 주장했다. 솔라나스는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다. 솔라나스는 당시 32살이었다. 그녀는 풀려난 후에도 워홀을 죽인다고 말하는 통에 병원에 갇히기도 했다.

[Daily News New York's Picture newspaper]


팩토리에서는 2건의 총격 사건이 더 발생했다.


언젠가 한 번은 낯선 이가 허공에 대고 총을 쐈다. 영화배우 도로시 폰더는 마릴린 먼로를 담은 작품에 대고 총 방아쇠를 당겼다. 모두 아찔한 해프닝이었다. 워홀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더 유명해졌다.


영화·음반·잡지까지 '창작'…끝은 허무했다  

앤디 워홀과 에디 세즈윅. [Burt Glinn]

워홀은 창작욕을 주체하지 못했다.


워홀은 영화에 푹 빠졌다. 16㎜ 촬영 장비가 흔한 때였다. 마음먹으면 누구든 영상을 찍을 수 있는 시대였다. 워홀은 캐스팅도 수월하게 했다. 팩토리에 늘 다채로운 손님이 있었다. 그렇게 해 워홀이 찍은 영화는 난해했다. 그의 결과물은 각본, 연출, 편집 등 날 것 그대로일 때가 많았다. 미술은 그렇게나 대중적으로 만들었으나 영화는 그러지 않았다. 가령 워홀의 1963년 영화 '잠(Sleep)'에서는 잠자는 남성을 5시간 내내 계속 비춰줬다. 보다 지친 관람객이 무대에 올라가 "이제 좀 일어나!"라고 소리치며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1967년 영화 '별 네 개(Four Stars)'는 상영 시간만 18시간20분이었다. 이 밖에 먹는 장면, 외설스러운 장면만 몇 시간씩 나오는 영화도 있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모습만 8시간5분동안 보여주는 작품도 만들었다. 이 영화는 워홀도 다 보기를 포기했다.

영화 팩토리걸(2007·조지 하이켄루퍼 작) 스틸컷
영화 팩토리걸(2007·조지 하이켄루퍼 작) 스틸컷

워홀의 영화는 희대의 실험작과 문제가 있는 괴작(?)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다.


그래도 뉴욕의 유명 호텔 '첼시'를 무대로 한 1966년 영화 '첼시 걸즈' 등은 히트했다. 재능있는 배우들도 발굴했다. 대표적 인물이 훗날 2007년 영화 '팩토리 걸'로 더 유명해진 에디 세즈윅이었다. 워홀은 드라큘라, 프랑켄슈타인 등 비교적 대중성이 있는 소재로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그가 감독으로 찍은 영화는 모두 60여편이었다. 이렇게 쏟아내면서도 창작욕이 남은 워홀은 거듭 딴짓을 했다. 독일의 모델 출신 가수 니코 등과 음반 작업을 했다. 1969년에는 대중문화 잡지 '인터뷰'도 공동 창간했다.

앤디 워홀, Chairman Mao [Saatch Collection, London]
앤디 워홀, Black and White retrospective [Galerie Bischofbergerm Zurich]

1970년대 이후로 워홀은 다시 회화에 전념했다.


주로 정치계나 사교계 인물을 그렸다. 대표작은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방중에 맞춰 만든 마오쩌둥 초상화였다. 워홀은 이제 원로 반열에 들어섰다. 그런 그는 아직 소년티가 남은 당돌한 '검은 청년'을 마주했다. 장 미쉘 바스키아였다. 워홀은 바스키아를 마음에 들어했다. 그 솔직함과 당당함을 보고 있노라면 젊을 때 자신을 보는 듯했다. 워홀은 바스키아와 함께 공동 전시도 했다. 자기만큼 명성을 얻는 바스키아에게 흐뭇함과 경계심을 함께 느끼기도 했다. 끝내 결별했지만, 그래도 이 '검은 피카소' 덕에 말년이 외롭지 않았다.

앤디 워홀과 장 미쉘 바스키아. [The 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l Art, Inc]
[Daily News New York's Picture newspaper]

워홀은 1987년 2월22일, 뉴욕 맨해튼에서 죽었다.


워홀은 담낭 수술을 받았다. 치료 후 경과는 좋았다. 그런 그는 잠을 자다가 갑자기 부정맥이 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당시 58세였다. 그간 삶과 견줘보면 허무한 죽음이었다. 워홀은 전설이었다. 1970년 라이프는 '1960년대 가장 영향력이 있던 인물'로 워홀을 선정했다. 함께 이름을 올린 밴드가 있었다. 바로 비틀스였다. 평생 독신으로 산 워홀은 피츠버그 성 세례 요한 가톨릭 공동묘지에 묻혔다. 인근에는 앤디 워홀 미술관이 세워졌다. 예술가 개인을 다룬 미술관으로는 미국 최대 규모다.


'흰색 두더지.'


워홀 친구들은 그가 파티에서 또 주뼛대고 있을 때 이렇게 놀렸다. 저 자식, 알고보면 저렇게 낯가림이 심한데도 용케 파티를 열고 다닌다고 소곤댔다. 누군가 워홀에게 이런 돌직구를 날렸다면 그는 무슨 말을 했을까. "…실은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이런 식이야. 쉬워 보이지만 쉽지만은 않아." 이렇게 답하지 않았을까.


〈참고 자료〉

발칙한 현대미술사, 윌 곰퍼츠, RHK

앤디 워홀 일기, 앤디 워홀, 팻 해켓, 미메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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