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터너-전열함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
유럽 대륙을 손에 쥔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제 바다를 향해 총구를 돌렸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칠 생각이었다. 끝까지 굴복하지 않는 저 섬나라를 박살 내 유럽 통일의 퍼즐을 맞출 요량이었다. 야심 찬 나폴레옹에게 1805년은 결전의 해였다. 선선한 바닷바람이 부는 10월, 나폴레옹의 독려를 받고 나선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는 영국 함대와 마침내 격돌했다. 양측은 스페인 남부 대서양 해안의 트라팔가르곶에서 깃발을 세우고 대치했다. 언뜻 보면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이 유리했다. 이들은 지휘관만 일곱 명이었다. 전열함 또한 서른세 척을 거느렸고, 이 중에는 포문이 136문이나 되는 초대형 배도 있었다. 반면 영국군의 지휘관은 고작 세 명이었다. 전열함도 스물일곱 척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영국군은 자신만만했다. 이들에게는 풍부한 해전 경험이 있었다. 그 시절 최고의 제독도 전장에 있었다. 그의 이름은 호레이쇼 넬슨, 이른바 '영국 해군의 영웅'이었다.
"잉글랜드는 귀관 전원이 각자의 의무를 해낼 것으로 기대하리라(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
넬슨의 격려하에 똘똘 뭉친 영국군은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을 세차게 몰아쳤다. 넬슨 특유의 저돌적 돌파 전술에 연합군은 당황했고, 이는 막대한 피해로 이어졌다. 이 해전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병사 4000여명을 잃었다. 포로로 8000여명을 빼앗겼다. 궤멸적 피해였다. 영국군의 사망자 수는 400여명에 불과했다. 격침된 배는 한 척도 없었다. 영국의 위대한 승리였다.
그런데, 사실은 영국군도 혈투 중 위기일발의 순간을 겪었다.
프랑스 최고 정예병이 모인 전열함 르두터블이 영국군의 기함(旗艦·지휘관이 탄 함정) HMS 빅토리에 바짝 붙은 일이었다. 르두터블이 빅토리를 나포하면 그 즉시 연합군은 해전의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었다. 어쩌면 전투의 결과 또한 다르게 쓰일 수도 있었다. 아찔한 상황에 놓인 영국군과 빅토리를 구한 게 영국의 98문 전열함 HMS 테메레르였다. 선상 백병전 채비를 한 프랑스 르두터블의 병사들은 테메레르의 기막힌 일제 포격에 사실상 전멸했다. 테메레르가 조국의 수호자가 된 순간이었다. 영국군이 약속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던 건 이 덕분이었다. 해전의 결과를 전해들은 영국인들은 명 제독 넬슨과 함께 테메레르를 승리의 일등 공신으로 여겼다. 용맹의 상징이 된 이 전열함에는 '파이팅 테메레르(Fighting Temeraire)'라는 별명도 따라붙었다.
영광된 전투가 끝나고 34년이 흐른 1839년은 그런 테메레르가 수명을 다한 해였다.
나폴레옹의 야망까지도 무너뜨린 테메레르였지만, 그 또한 시간 앞에서는 무기력했다. 더는 찾는 지휘관도 없고, 불러주는 전장도 없었다. 낡은 테메레르의 퇴장은 초라했다. 템스강을 가로질러 로더히스 조선소로 간 테메레르는 맥없이 쪼개졌다. 영국인들은 군 복무를 마친 테메레르의 쓸쓸한 최후에 눈물을 흘렸다.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1775~1851)는 테메레르가 예인(曳引)되는 그 역사적인 장면을 캔버스에 담았다.
바다 위 증기선과 테메레르가 보인다. 붉은 석양이 사방으로 흩뿌리는 빛, 그 밑에서 은은하게 반짝이는 윤슬의 조화는 황홀할 만큼 아름답다. 그런데 그림의 구성이 독특하다. 터너는 연기를 뿜으며 힘차게 나아가는 증기선을 화폭 속 주인공처럼 그렸다. 테메레르는 분명 크고 웅장하다. 그러나 지금은 이 씩씩한 작은 배에 의지한 채 힘겹게 물살을 가르고 있다. 이는 기운찬 젊은 장교가 은퇴식을 맞은 흰머리의 백전노장을 부축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 시절 증기선은 제1차 산업혁명이 일군 기술문명의 눈부신 상징이었다. 반면 테메레르는 노병들의 유물일 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두 척의 배만큼 비중 있게 그려진 노을 또한 저물어가는 테메레르의 시간을 암시하는 듯도 하다. 터너는 테메레르의 퇴직에 경의를 표함과 동시에, 이로써 구시대(테메레르)가 저물고 신시대(증기선)가 열리고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었다. 즉, 황혼의 서글픔과 함께 여명의 기개까지 담은 작품이었다.
영광 어린 과거의 퇴장은 분명 서글프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만의 새 역사도 일궈가야 한다.
터너가 그림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해체를 위해 최후의 정박지로 끌려가는 테메레르)'를 통해 하고싶은 진짜 말이었다. 특히나, 고루하고 경직돼 그의 속을 벅벅 긁는 한 집단을 향해 내리꽂는 메시지였다. 그곳은 영국의 문화 예술계였다.
터너는 스스로가 영국 화단에 쓴소리할 자격이 있다고 여겼다.
당시 터너는 예순네 살의 노인이었다. 그는 그럼에도 혁신의 깃발을 놓지 않은 채 보수적인 화단에 맞서고 있었다. 그의 무기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탁월한 감각, 아울러 평생을 갈고 닦은 밀도 있는 표현력이었다. 터너가 고개를 더 높이 들 수 있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것은 영국의 특수성이었다. 사실 영국의 문화계는 오랜 기간 불모지에 가까웠다. 다른 유럽 선진국이 불세출의 화가를 배출하는 동안 영국은 한스 홀바인(독일·Hans Holbein·1497~1543)과 오라치오 젠틸레스키(이탈리아·Orazio Gentileschi·1562~1647), 안토니 반 다이크(네덜란드·Anthony Van Dyck·1599~1641) 등 예술가를 수입하는 처지였다. 이러한 굴욕적 역사를 품은 영국 입장에서 천재 터너는 신이 국가를 안타깝게 여겨 내려준 선물 같았다. 그렇기에 그의 행실이 어쨌건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터너는 1775년 런던의 코벤트가든 근처에서 태어났다.
터너는 가발 가게를 운영하는 이발사 아버지 밑에서 컸다. 환경이 좋지는 않았지만, 곧장 그림에 소질을 보인 덕에 방황하지 않았다. 아버지 또한 아들의 그림을 이발소에 대문짝만하게 걸어두는 등 최선을 다해 지지했다. 터너는 건축 제도사 토마스 말턴의 조수로 첫 직업을 구했다. 현장에 나가선 작업 겸 취미로 다양한 배경의 풍경화를 그렸다. 빛나는 재능은 묻히지 않았다. 터너는 곧 영국 최고의 명문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때가 고작 열네 살이었다. 1796년, 터너는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전시에서 그의 첫 유화 '바다의 낚시꾼'을 전시했다. 진한 달빛이 풍랑 위 항해를 이어가는 낚싯배를 비추는 그림이었다. 이는 그 시절 유행한 밤 풍경 그림의 일종이었다. 터너는 이 그림으로 재능과 실력을 모두 입증했다. 1799년에는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정식 회원도 될 수 있었다. 붓을 쥔 이발사의 아들은 그렇게 꽃길을 걸었다. 그는 명예와 함께 런던 중심부로 이사를 갈 수 있을 만큼의 부도 쥐었다.
터너는 자기가 미술에 대해 독보적 재능이 있다는 걸 알았다.
터너는 차츰 더 큰 야망을 품었다. 그것은 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일이었다. 그런 터너가 전념한 분야는 풍경화였다. 그는 역사화와 신화화, 초상화와 견줘 저평가를 받는 풍경화의 가치를 끌어올리고 싶었다. 나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이에게는 없는 예민함과 타고난 공간 감각이 있었다. 빛과 물, 공기의 은밀한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미세하게 변하는 세상의 분위기도 표현할 수 있었다. 풍경화 안에 역사화 못지않은 몰입감을 심을 자신도 있었다.
터너는 이 무렵 프랑스 출신 풍경화가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1600~1682)의 그림을 접했다.
그는 특히 로랭의 '시바 여왕의 승선'을 보고 감격에 젖어 눈물을 흘렸다. 구약 성서 속 인물 시바 여왕의 이야기를 담은 이 그림은 분명 풍경화의 일종이었다. 황금빛 일출, 부드러운 바다, 로마풍 건축물 등 풍경은 장엄하고 아름다웠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었다. 시바 여왕과 그녀의 행렬, 멀리서 여왕을 구경하는 사람을 자연스럽게 등장시킴으로 역사화와 신화화 특유의 '스토리'도 품었다. …내 앞길을 먼저 터준 사람이 있었다. 터너는 그보다 2세기 가까이 먼저 살다 간 로랭을 평생의 스승으로 여겼다. 그가 가고자 하는 길이 틀리지 않다는 걸 로랭의 유작을 보고 확신했다.
그것은 지옥의 행군이었다
기원전 218년. 4만명에 가까운 병사와 8000마리의 말, 서른일곱 마리의 코끼리가 알프스산맥 위를 비틀대며 걸었다. 이들은 발을 묶는 눈, 살을 에는 바람, 험준한 고개를 뚫고 나아갔다. 하나, 둘 픽픽 쓰러지면 그 얼어붙은 몸뚱이를 발판으로 삼고 움직였다. "제군들, 우리는 길을 찾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길을 만들 것이다(We will either find a way, or make one)." 발걸음이 느려지면 맨 뒤에 선 장군이 이들을 독려했다. 그는 카르타고군의 총사령관, 한니발 바르칼이었다.
한니발의 초강수는 제대로 먹혔다.
당시 로마 제국은 한니발의 진격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 길을 뒤로 한 채 굳이 알프스산맥을 넘어오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한니발의 카르타고군은 당황한 로마군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그렇게 거침없이 돌격한 카르타고군은 제국을 궤멸 직전까지 내몰았다.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나오기 전까지, 한니발은 제국 최대의 숙적이자 최악의 악몽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이로부터 2000년 가까이 흐른 1812년, 터너는 한니발의 전설적인 알프스 행군을 그림으로 그렸다.
제목은 '눈 폭풍,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과 그의 군대'였다. 터너는 한니발의 이 전설적 일화마저 풍경화로 표현했다. 아가리를 쩍 벌린 채 덮쳐오는 새카만 눈보라가 눈길을 끈다. 태양도, 구름도 집어삼킬 기세의 바람과 깎아내린 듯한 절벽, 운석 조각처럼 박힌 바위에서 대자연의 위엄을 느낄 수 있다. 터너의 그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눈 폭풍은 병사들의 숨통을 위협하고 있다. 그사이 매복한 알프스의 부족 또한 이들의 장비와 군량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명장 한니발은 지평선 저 멀리서 우왕좌왕하는 코끼리를 잡아탄 채 겨우 진격하고 있다. 한니발은 그저 작고 초라해 보인다. 그의 무모함, 이에 따른 병사들의 희생만 부각될 뿐이다. 실제로 당시 한니발은 알프스산맥을 넘으며 병사 절반을 잃었다. 사실, 그의 저돌적 전술은 직후 눈부신 승리가 있었기에 빛날 수 있었다.
당시 영국인은 이 풍경화를 보고 나폴레옹을 떠올렸다.
터너가 이 그림을 그리기 전인 1800년, 나폴레옹 또한 북부 이탈리아를 치기 위해 알프스산맥을 돌파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5년 뒤 프랑스·스페인 연합군과 영국군 사이 트라팔가르 해전이 벌어진 것이었다. 터너가 그런 나폴레옹을 좋게 봤을 리 없었다. 터너는 처량한 한니발을 그렸지만, 실은 그가 원한 나폴레옹의 최후를 그린 격이었다. 터너는 이 그림에 풍경화의 웅장함, 역사화의 이야깃거리를 다 담았다. 이제 그는 2세기 전 그의 우상, 로랭과 어깨를 견주고 있었다. 한편 나폴레옹은 터너의 이 작품이 발표된 뒤 얼마 안 돼 워털루 전투에서 참패했고,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터너는 계속 승승장구하는 듯했다.
터너의 독창성을 따라올 이는 없었다. 가끔은 대상을 필요 이상으로 흩뜨려 놓는다는 식의 지적도 있었지만, 그의 자리는 여전히 굳건했다. '국회의사당 화재' 등 꾸준히 대작을 찍어낸 터너가 1839년에 내놓은 그림이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였다. 터너는 이 그림을 끔찍이 아꼈다. "돈을 주든, 부탁하든,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 그림을 다시 빌려주지 않을 테다." 그는 이런 글도 썼다. 이 작품은 훗날 '가장 위대한 영국인의 그림'을 묻는 BBC 설문조사에서 1위로 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터너의 꽃길에도 점차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1840년, 터너는 왕립 아카데미 전시에 충격적인 그림 한 점을 내걸었다. '노예선(폭풍우가 밀려오자 죽거나 죽어가는 이들을 바다로 던지는 노예 상인들)'. 제목부터 심상치 않았다. 터너는 석양을 감싸며 뒤엉키는 붉은 빛과 노란빛, 잿빛 하늘과 회색 바다 등을 현란한 붓질로 그렸다. 두껍게 덧칠한 물감이 화폭 전체에 어지럽게 펼쳐졌다. 요동치는 공기, 밀려오는 파도는 색채의 소용돌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터너가 기법만큼이나 신경을 쓴 건 주제였다. 터너가 이 그림을 통해 말하고자 한 건 1783년, 노예 400여명을 태운 영국 국적의 배 종(Zong)호에서 벌어진 비극이었다. 종호는 노예를 팔기 위해 한껏 내달렸지만, 곧 갑판 아랫부분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된다. 선원들은 이대로면 배가 침몰할 수도 있겠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이들은 결국 병들고 지친, 그래서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노예들을 골라 바다에 수장시켰다. 그렇게해 배를 가볍게 하고, 배 위 전염병의 창궐 또한 막으려고 했다. 아울러 이렇게 노예를 '실종'시켜 보험금도 챙길 수 있었다. 이번에는 풍경화에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담은 격이었다.
그림을 뜯어보면 휘청이는 배, 사슬도 풀지 못한 채 물에 잠긴 노예들의 팔다리를 볼 수 있다.
노예들에게 달려든 갈매기와 식인 물고기도 섬뜩함을 더한다. 그런데, 이번 그림은 기법과 주제 모두 너무 파격적이었을까. 그간 의기양양했던 터너를 고깝게 본 몇몇 평론가를 중심으로 비판이 이어졌다. "재능이 녹슬고 말았다"는 등 터너로서는 딱 질색인 혹평도 있었다. 터너의 실험과 혁신은 영국 미술계가 소화하기에 버거운 수준까지 오른 것이었다.
절치부심한 터너는 2년 뒤 새로운 그림을 선보였다.
'눈보라(항구 어귀에서 멀어진 증기선)'였다. 터너는 이제 대상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리기를 포기한 모습이었다. 형상은 점점 사라지고 색채는 더 강렬해졌다. 하늘과 물결, 배와 풍랑, 사정없이 몰아치는 눈보라가 뒤엉켜 하나의 덩어리가 된 것처럼 보인다. 빨려 들어갈 듯한 압도감만큼은 생생하게 다가온다. 이 그림에 대해선 흥미로운 설이 있다. 예순일곱의 터너가 쇠한 몸을 이끌고 이 눈보라에 직접 몸을 던졌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터너가 돛대에 자기 몸을 꽁꽁 묶은 채 네 시간가량을 눈보라 한가운데에서 버티고 그 경험을 화폭에 녹였다는 이야기다. 다만, 터너가 실제로 그런 일을 벌였다는 정확한 증거는 없다.
젊은 시절부터 연구를 이어간 그는 드디어 꿈에 성큼 다가갔다.
마침내 미술의 새로운 지평으로 발을 디뎠다. 그곳은 형체 따위 중요하게 보지 않는 인상주의와 추상회화의 세계였다. 훗날 터너는 '인상주의자들의 인상주의자'이자 추상회화의 가능성을 진작부터 엿본 화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이는 미래의 평가일 뿐이었다. 터너의 급진적 그림은 또다시 평론가들의 비판을 불렀다. "비누 거품과 회반죽 덩어리", "크림과 초콜릿, 계란 노른자와 건포도 젤리로 그림을 그리는 노친네" 등의 악의적인 지적도 있었다. 터너는 절망했다. 터너는 여전히 스타 예술가였지만, 그가 받은 상처는 생각보다 더 깊었다.
터너는 1840년대 들어 점점 더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이름을 바꾸는가 하면, 아예 죽은 사람처럼 바깥세상과 연락을 끊은 채 은둔한 적도 있었다. 인구 조사에 기록되는 게 싫다며 조사 기간 중 아예 강 한가운데로 배를 몰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쯤 영국에서는 터너를 놓고 이런저런 말이 많았다. 그럼에도 영국 화단은 그의 천재성을 뛰어넘는 토박이 화가를 찾지 못했다. 터너가 1845년, 일흔 살 나이로 왕립 아카데미 원장 대리직에 오를 수 있는 이유였다. 말년의 터너는 제자와 후계자가 없는 화가로 고독하게 살았다. 사귄 여인이 두 명쯤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결혼도 하지 않았다. 터너는 1851년 12월 런던에서 사망했다. "태양은 신이다." 그의 유언이었다고 한다. 그는 팔지 않은 채 갖고 있던 그림을 국가에 기증했다. 내셔널 갤러리, 테이트 브리튼 등은 터너의 통 큰 결정 덕에 그의 대표작을 내걸 수 있었다.
터너가 죽고 100년이 훌쩍 지난 1984년, 영국 테이트 브리튼은 '터너상'을 제정했다.
지난 한 해 주목할 만한 전시나 프로젝트를 보여준 50세 미만 작가에게 수여하는 상이었다. 터너의 이름을 딴 이 상은 지금도 영국 최고 권위의 현대미술상으로 통한다. 나아가 국제 미술계가 주목하는 연례행사로도 인정받고 있다.
<참고자료〉
나폴레옹 세계사, 알렉산더 미카베리즈, 책과함께
나폴레옹 전쟁, 그레고리 프리몬-반즈, 플래닛미디어
The Life of Horatio Lord Nelson, Southey, Robert, Alpha Edition
한니발, 필립 프리먼, 책과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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