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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쯤, 제주 #7

<약속>

by 이원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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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의 약속을 지키는 건 즐거운 일이다. 나에게선 잠들기 전 러닝, 책 읽을 때 기록, 연휴 때 서점·도서관 상주 등이 대표적인 약속이다.


여행 일정에도 지키려고 의식하는 게 있다.


미술관과 아쿠아리움 방문이다. 그 나라와 그 도시의 특색을 가장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공간이다.


미술관을 찾는 게 견문을 넓히고자 하는 일이라면, 아쿠아리움을 방문하는 건 말그대로 즐거움을 위해서다. 어부의 아들이 아니다. 수영을 잘 하지도 않는다. 물고기 음식을 즐겨먹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물 속을 살펴보는 건 내게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어릴 적 쌓아두고 읽던 위인전 중에는 항해사의 일생을 다룬 책이 많았다. 이 덕분에 내 상상력의 상당 부분을 바닷 내음으로 덧칠할 수 있었다. 물 속이란 말은 내게 늘 모험심을 심어주던 말이었다. 또 어쩌면 위험과 안도에 노출되는 모순적인 감정을 느끼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물과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가장 안전히 바라볼 수 있다. 유리벽 한 장이 전해주는 안정감 덕분이다.


제주도의 아쿠아리움(아쿠아플라넷)은 다채롭다.


둘러보기에는 일본 오사카의 아쿠아리움(가이유칸)보다 괜찮았다. 가이유칸이 충실한 박물관의 인상이었다면, 아쿠아플라넷은 눈길을 사로잡는 장식적인 요소가 많은 '엔터테인먼트'의 느낌이 강렬했다.


그 사람도 나와 비슷했다. 물과는 큰 인연이 없는 듯 보였으나(되레 무서워하는 것 같았으나) 유리벽을 두고 지켜보는 일은 즐거워했다. 우리는 나라와 강 테마로 있는 물고기를 살펴보며 길을 걸었다. 상어와 송사리가 한 공간에 있어도, 단지 그뿐이었다. 이들은 제각기 사회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중이었다. 몸을 굽히고 들어간 후 고개를 쏙 들면 펭귄들의 사는 모습을 코 앞에서 볼 수 있는 공간도 인상적이었다. 일정이 맞지 않아 이 안에서 진행되는 퍼포먼스들은 못 봤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모든 관람이 끝난 후 마지막 공간에서 볼 수 있는 초대형 수조다. 웬만큼 멀리서 보지 않고서는 한 눈에 담을 수 없는 크기였다. 내부에는 온갖 종류의 물고기 수백마리가 떠다니는 듯했다. 우린 지친 상태에서 앉아 멍하니 수조를 바라봤다. 둘 다 별 다른 말이 없던 그 때, 나는 바닷물을 생각하려 했다. 물결로 쏟아지는 별과 달을 생각하려 했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우리 둘 사이에 놓인 정겨운 침묵을 즐겼다. 여간 멋진 일이 아니었다.


짧은 순간 자유를 느낀 덕일까. 바다와 섬을 배경으로 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책 '그리스인 조르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조르바는 어느 늦은 밤 바닷가 위 모닥불과 주인공 사이에서 춤을 춘다. 정해진 움직임은 없다. 그저 눈을 지긋이 감은 후 스스로의 흥얼거림에 이끌려 몸을 이리저리 돌릴 뿐이다.


"두목, 세상에서 이 조르바만큼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리는 것 같다.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일 뿐입니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과거로 남겨두고 미래로 향해가야 합니다. 언제까지 과거 문제로 미래의 발목을 붙잡을 요량입니까." 이 구절을 되새긴다. 내가 아직 상실감에 연연하고 있다는 사실이 퍼뜩 떠오른다. 가슴을 쓸어가는 추의 두께는 점점 얇아지고 있다. 성실히 흘러가는 파도 같다. 사실감은 사라진다. 언젠가, 언젠가는. "이제 움직여볼까." 그 사람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들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렇게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


우리는 제주를 찾았을 때 그랬던 것처럼, 제주에서 돌아갈 때 또한 즐거운 분위기를 이어갔다. 마침표처럼 보이는 이 여정은 사실 끝이 아닌 시작이란 것을 알기 때문에.


이제 다시 서울 땅을 밟고, 탈탈 돌아가는 태엽을 뒤로 감아야만 한다. 한 사람의 일생을 긴 영화에 비유하면 기억은 그 안에서 핵심으로 꼽힐만한 장면들을 선택한다. 그런 점을 볼 때 우리의 이번 쉼표는 내게 수십장의 이미지를 남겨줬다. 영화로 치면 전개 분량이, 책으로 치면 페이지 수가 더 많아진 게 아닐까. 오랜 시간 기억에 품고 싶을만큼 평화로운 시간이었다는 이야기다.


애초 이 땅에 발 붙이고 사는 사람치고 사연 없는 이는 없다. 아무리 보잘것 없는 이라 할지라도 우주만한 크기의 사연 하나쯤은 가슴 속 깊에 간직하고 살아간다. 문제는 이를 들어줄 사람이 없는 데서 발생하곤 한다. 그런 점을 볼 때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이번 기간, 풀 피리 소리처럼 옅게 이어지는 내 이야기를 그 사람과 제주의 땅 한켠이 마음으로 들어줬기 때문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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