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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쯤, 제주 #6

<중섭>

by 이원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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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목 높이는 법이라는 부제를 단 《크레셴도 크레셴도》를 쓴 직후 쓰고 싶은 것은 이중섭을 다룬 책이었다.


많은 그림을 봐왔지만 사람 마음까지 움직이는 작품은 드물었다. 명작으로 포장한 무수한 그림들은 그저 화려한 장식품으로 다가왔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그림은 '그림만을 위한 그림'이다. 이는 작가가 다른 의도 없이 오직 이걸 그리는 게 너무 재미있다, 혹은 지금 이걸 안 그리면 죽을 것 같다란 생각이 담겨있는 그림을 말한다. '돌아오지 않는 강'. 이중섭의 이 그림은 내게 그런 느낌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를 천재라고 띄울 생각은 없다. 그저 이 사람은 그릴 줄은 알았구나하고 볼 뿐이다.


우리가 제주를 생각할 때부터 나는 서귀포시에 있는 이중섭거리를 찾겠다고 했다. 이곳도 지난 겨울에는 날씨가 좋지 않아 방문을 포기한 곳이었다. 덕분에 이 사람과 함께 걷게 되었으니 이 또한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제주의 마지막 날 아침 이중섭거리에 도착했다.


크고 화려하진 않다. 이중섭의 작품·편지를 다루는 작은 미술관과 한 때 그가 살던 집, 정원이 전부였다.


미술관이 비춘 이중섭은 말그대로 그리지 못하면 살 수 없어서 그림을 그린 남자였다.


어릴적엔 그저 순수하게 소가 좋아 소를 그렸고, 1950년 6ㆍ25전쟁 피난 도중에도 견딜 수가 없어 그 풍경을 그렸다. 1951년 제주도로 와 부두 막노동을 할 때는 게를 잡아먹는 아내와 아이들을 그렸다. 돈이 없어 이들을 일본으로 보낸 이후에는 지난 추억들을 그렸다.


대부분의 사람에겐 그림보다 삶이 먼저였겠지만, 그에게는 삶보다 그림이 먼저였던 것 같다.


%EB%8F%8C.jpg 이중섭, 돌아오지 않는 강, 1956


말라버린 황소, 은박지에 긁어 만든 게와 아이들 등 많은 작품들이 있지만, 내가 보는 이중섭의 진수는 '돌아오지 않는 강'이다.


그가 죽기 직전까지 매달린 연작이다.


그림은 이중섭의 기세가 약하다. 그를 대표하는 야수파의 거친 선 내지 근근히 이어지는 애절한 선이 없다. 이 그림은 고요하다.


그림 속 그녀는 결코 다가갈 수 없다. 발걸음을 기다리는 그도 사실 그녀가 오지 않을 것을 안다. 얼굴을 비스듬히 눕힌 그는 행복했던 기억들을 더듬는다. 한때 보물처럼 보인 그 잔상들이 이젠 타오르는 숯 같다.


돈이 없어 아내와 자식만 일본으로 보낸 이중섭은 늘상 재회를 꿈꿔왔다.


곧 만나면 아들에게 꼭 자전거를 사줄게…. 이 같이 부푼 꿈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저 꿈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힘들어한다. 술을 마신다. 옛 추억을 더듬으며 그림을 그린다. 몰입이 더해질수록 환각은 심해지고 몸도 급속도로 망가진다.


소위 예술가란 사람들은 대개 불안하다. 예술의 길로 이끈 깊은 감수성이 되레 생존력을 낮추기 때문이다.


영국의 테런스 래티건이라는 극작가는 '바다는 깊고 푸르고'라는 희곡을 썼다.


가스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한 젊은 여성에게 아파트 관리인이 묻는다. "왜 그런 일을 했나요." 그녀가 대답한다. "앞에는 악마, 뒤에는 깊고 푸른 바다. 그런 절박함에 몰리면 깊고 푸른 바다가 매혹적으로 보일 수 있어요. 어젯밤 제가 그랬어요."


이중섭은 현실에서 가족을 그리워하기보다, 몸을 혹사시키면서 가족 품에 돌아가는 길을 택한 것 같다. 그만의 깊고 푸른 바다에 풍덩 빠져들길 택한 셈이다. 그러고는 어느 날 깨닫는다. 부모님과 형제, 새로 만난 아내와 두 아이, 그림을 보고 그리는 힘. 모든 것을 잃었구나. 나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구나.


아쉽게도 우리가 간 그 미술관에 그 그림은 안 보였다. 사실 이곳의 'ㅈㅜㅇㅅㅓㅂ'이라고 쓰인 작품 대부분도 복제품이라고 한다. 우리는 그가 남긴 그림과 편지, 그의 친구들이 그를 두고 쓴 글을 차근차근 읽었다.


안은 둘 말곤 없을 만큼 고요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숨죽여 이야기했다. 쓸쓸히 생을 끝마친 그가 살아 돌아온 후 이 안을 둘러보는 모습을 상상했다. 이런 그림, 편지를 쓴 사람이면 젠체하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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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살던 집, 그가 걷던 정원은 미술관의 바로 아래 위치한다.


이중섭에게 세를 받지 않고 방을 준 집의 안주인인 할머니는 지금도 이 집에 살고 있다. 눈과 귀는 거의 다 멀었다고 했다. 그녀는 세월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 중이었다.


바다가 훤히 보인다. 안으로 들어가면 네 식구가 잡아먹던 게가 깨작깨작하며 돌아다닐 것 같다. 쪽방은 보일러실 같이 작다. 이런 곳에 몸을 두고 그림을 그렸다.


네 식구가 다시 사는 꿈을 꾸며, 돌고 도는 과정을 거친 끝에 현실을 마주한 곳이다. 별 볼 일 없는 풍경들이 그의 지난했던 삶을 대변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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