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
이번 글을 그간 분위기와 다르다.
한라산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솜씨있는 조각가가 다듬은 것 같은 푸른 언덕, 양치기 개를 부둥켜안고 뒹굴뒹굴 굴러야만 할 것 같은 깊은 들판, 아픈 소리를 내면서도 생글생글대며 온종일 함께 걸은 그 사람을 두고 종일 상실에 대한 이야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손 잡고 한라산을 가기로 한 셋째 날이 밝았다.
그 사람은 이번 쉼표 기간 중 한라산을 꼭 가보고 싶었다고 했다. 나 또한 지난 겨울 폭설로 인해 중턱에서 내려와야 했던 적이 있어 그의 말이 반가웠다.
걷고 뛰는 일을 좋아한다. 사람은 원래 걷고 뛰면서 살아온 동물이다. 본성에 어긋나지 않는 자연스런 행위라는 이야기다. 순리를 따르는 행동이기 때문인지 정신없이 걷고 뛰다보면 어느새 머리도 개운해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잡념이 사라지고 아이디어가 샘솟는다. 내가 떠올린 많은 아이디어는 책상을 떠나 걷고 뛰고, 물을 맞으면서 다듬은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함께 택한 길은 영실 길이었다. 한라산을 오르는 길 중 가장 완만한 편이면서 주변 경치가 아름다운 길이라고 했다. 함께 가기 전에 초콜릿을 샀다. 그 사람은 이게 없으면 안 된다며 김밥 두 줄도 샀다. 산에서 먹는 김밥은 차원이 다르단다. 좀 더 어릴 때는 산에서 먹는 김밥은 왜 이렇게 맛있을까라며 혼자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있다고 한다. 김밥을 오물오물 씹으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을 어린 시절의 그 사람을 상상했다. 귀여운 사람이다.
이른 오전, 돌과 나무는 모두 쉬는 중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이불처럼 덮은 온기가 날아가지 않도록 천천히 걸었다.
올라가는 길 곳곳마다 한라산의 단면도와 현 위치를 찍어주는 표지판이 보였다. 1/3지점까지는 눈에 띄게 급경사로 그린 후 그 다음 지점부터는 다시 봐도 산일까 싶을 만큼 평지같은 경사로 선이 그어져 있었다. 한라산의 단면도가 엎은 밥그릇처럼 어색해보일 정도였다.
사실 그렇게 단면도를 그린 마음이 이해는 간다. 등산객 중 영실 코스를 오르다가 "편한 길이라더니 처음부터 경사가 왜 이렇게 급한거야. 빌어먹을!"하고 그 고비를 못 넘긴채 내려가는 이가 꽤 있었던 것이다. 제주시는 처음 급경사만 올라가면 거짓말같이 탁 트인 평지가 이어진다고 해명하고 싶었던 셈이다. 물론 내 추측일 뿐이다.
하지만 그럴 생각이 들 만큼 처음 1/3지점 길은 꽤 험난한 편이었다.
처음부터 긴장을 하고 갔더라면 덜 힘들었을 것 같다. 겨울이 아닌만큼 땀도 꽤 쏟았다. 내 손을 잡은 그는 붉게 상기된 채 "나, 마라톤은 하겠는데, 등산은 힘들, 것, 같아"라는 말을 처음 듣는 스타카토 화법으로 전해줬다. 그래도 중간중간 위안이 된 건 곧게 뻗은 나무, 이름 모를 들꽃 등이었다.
돌로 만들어진 길, 깊은 절벽이 보여 아찔한 길, 새가 '쪼롱쪼롱' 울음소리를 내는 길을 지났다.
그 사람은 새 소리를 흉내내며 웃는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 구간을 넘으니 거짓말처럼 길게 펼쳐진 평지가 나타났다. 산 중턱에 있는 넓은 들판이다. 둘 다 눈 앞에 펼쳐진 그 광경이 신기해서 가만히 바라봤다. 가쁜 숨소리도 약속한듯 사그라들었다. 길 위에서 갑자기 만화 속 주인공이 튀어나와 함께 모험을 떠나지 않겠느냐고 손 내밀 것 같은 풍경이다. 좋고 말고. 초보자용 옷을 입은 주제에 마왕을 때려잡기 위해 움직이는 게 아니라면 얼마든지.
"저기 봐요."
혼자 망상에 빠져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그 곳에서 가장 예쁜 부분을 잘 찾아내는 사람이다. 하늘은 높이 솟아있고, 들판은 바람에 살랑였다.
둘 다 바다 물결 같다.
쉼표를 찍는 동안 낯선 공간에서 더 넓은, 더 풍부한 경험을 하고 싶다면 G.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먼저 읽어봐야한다던 문장이 떠올랐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마술적 요소를 즐기는 리얼리스트였다.
마르케스의 소설 속 묘사는 마치 사진으로 보는 것 같다. 단지 누구는 사진 속 죽은 할아버지와 대화하고, 누구는 이무기와 끼니를 나눠먹을 뿐이다. 어떤 여자는 산 채로 승천하고, 아버지가 죽는 날에는 하늘에서 꽃비가 떨어진다. 표현이 생생하고, '밥을 안 먹으면 당연히 배고파하는' 소설 속 인물들도 그런 일을 너무나 당연히 받아들이는 통에 읽는 이도 착각에 빠진다. 마르케스가 평생 이런 자연 풍경들만 보고 자랐다면 깊은 상상력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듯하다. '백년동안의 고독' 속 문장들이 떠오른다. 정말 하늘이 말을 걸고 들판이 내가 하는 말을 엿들을 것 같다. 그런 생각 하나만으로 마술적 경험을 한 듯한 느낌이다.
그사람이 웃는다. 산을 오를 동안 서랍 안에 줄곧 갇혀 있다 오랜만에 빛을 보는 듯한 친밀한 미소였다. 다시 반달 눈이 되는 그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눈웃음을 따라 어릴 적 맡은 꽃 향기가 스며나오는 느낌이다.
이때부터 한 두방울씩 비가 떨어지고 있었지만 큰 걱정은 없는 상태였다. 혹시나 해 챙긴 우비가 든든하게 느껴졌다. 빗방울이 점차 굵어졌다.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날씨였다.
우리는 2/3지점까지 오른 후 한 대피소에서 김밥을 야금야금 챙겨먹고 초콜릿까지 입에 앙 넣은 채 내리막길을 걸었다. 애초 오후 늦게부터 비가 올 것으로 예보가 된 탓인지 같은 지점에 오른 사람들 중에는 우비를 챙겨오지 못한 이가 꽤 있었다. 그들은 식사 이후 예상이나한듯 우비를 주섬주섬 챙겨 망설임없이 떠나는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그 사람들, 우리 부러웠겠지?" 우리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내려가고 또 내려갔다. 등산을 꽤 한 편이지만 장대비 틈에서의 하산은 처음이다.
하산 직후 그 사람은 내게 숙소로 가는 길의 운전을 주문했다.
내 면허는 그간 장롱 안에 숨겨왔다. 운전 경험은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인 2010년 8월 도로주행시험을 친 이후로 끝이다. 내리막길을 수시간 째 내려오다보니 무릎은 욱신거렸다. 빗방울은 더욱 굵어지고 있다. 문제는 이런 상황을 그가 모두 알고 있다는 점이다. 어린아이같은 천진난만한 미소로 나를 시험에 들게하는 중이었다.
물론 뺄 생각은 없다.
사실 그가 여태 운전을 능숙히 해온 덕에 나는 큰 고마움과 함께 미안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믿음직한 코치 아래 운전대를 잡고 살랑살랑 내려갔다. 누군가가 운전은 부모님한테도 배우는 게 아니라고 당부했지만, 다행히 그 사람의 인내력은 그 순간만큼은 신급에 가까웠다.
원래 긴장하면 얼굴이 더 평온-더 정확히 말하자면 무표정-해지는 성격이라, 다른 운전자가 보기에는 내가 느린 속도을 즐기는 할아버지 감성의 운전자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의 나는 외피를 떠나 내 미래를 걱정 중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빗길에 미끄러져 이곳 가드레일에 부딪히면 우리 둘다 최소한 죽지는 않겠지라는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내 옆 코치가 몇 차례 '엄마야!'를 외치긴 했지만 다행히 가드레일에는 스치지도 않았다)
이날 일정은 깔끔하게 끝이었다. 계곡물에 빠지지도 않고, 절벽으로 굴러 떨어지지 않고, 못된 말벌에도 안 쏘이고, 사나운 호랑이랑 마주하지 않고, 심지어 내려오는 길에 타이어에 펑크조차 나지 않았다. 그도 나와 같은 좋은 추억이었는 듯 "좋았어"라고 웃었다.